여성 사이의 대화에서 '마음에 안들죠?'가 남자들의 대화에서 'X같냐?'라는 말과 같은 어감이라고? 유명 방송인인 허지웅이 자신의 SNS에 올린 이런 궤변이 포털 사이트에서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는 상황은 그야말로 지금 한국 사회의 남근주의적 권력의지의 증상이다.

말을 그냥 말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남자 뜻 여자 뜻 가르는 걸 보면, 그리고 젊은 여성 연예인들의 다툼에서 시시비비 가르는 것이 방송국에서 영상 자료 유출된 것보다 더 분석할 일이라도 되도록 만드는 걸 보니, 나름 진보를 자처하던 그 평론가도 별 수 없이 라캉적으로 설명하자면 남성 주체로서 여성을 타자화하려는 증환을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문화이론과 철학을 통해 보자면 이런 증환을 가진 자들에게 있어 언어는 상징계를 지배하는 남자의 영역이다. 굳이 여성의 언어를 남성의 언어로 풀어내야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은 남성의 언어와 여성의 언어를 ‘랑그’와 ‘파롤’로 나누었기 때문일 것이다.

구조주의 언어학자 소쉬르에 따르면 언어는 다른 이와의 의사소통이기 때문에 서로 공통된 규칙이 존재하는데, 공통된 문법이나 낱말들에 존재하는 서로간의 규칙으로 고정적인 것을 랑그, 같은 말이라도 상황이나 억양에 따라 받아들이는 뜻이 달라지면서 개별적으로 대화하는 것을 파롤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굳이 ‘마음에 안들죠’라는 쉽고 일상적인 여성의 언어를 도저히 이해 못해 예외적 맥락이 있겠거니 주변에 물어보았다는 것은 남성의 언어는 랑그, 여성의 언어는 파롤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파롤을 굳이 랑그로 풀었더니 완벽하게 이해가능하다고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속한 남성-랑그 세계의 권력 바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모든 것을 남성-랑그로 이해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는 것이다.

   
 
 

이런 허지웅 식 판단을 라캉의 관점에서 풀어 보자면 여성의 언어는 기표의 질서를 구멍내는 심연, '케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케보이’(Che Vuoi)는 라캉에 대한 대중적 해설가 슬라보예 지젝의 설명을 빌자면 ‘너는 그것을 말하지만, 그것을 통해 도대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겨냥하는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허지웅 평론가가 언급한 'X'가 통상적으로 쓰이는 것처럼 남성의 특정신체부위를 말하는 거라면, 그리고 그게 욕설이거나 비하에 쓰이는 표현이라면, ‘마음의 안들죠’를 이해 불가능한 파롤로 규정하고 ‘X같다’라는 그들의 랑그 규칙의 맥락에서 비로소 이해했다는 허지웅 스스로의 남성성은 참으로 비굴하다.

사전을 찾아보면 허지웅의 개인 SNS에서 'X'로 감춰진 말의 원형인 '좆'은 '성인 남성의 성기를 비속하게 이르는 말'이다. 참고로 '성인 남성'에게만 국한되는 '좆'은 비속어이지만 생물 일반에 걸쳐 남자의 생식기 중 몸 바깥으로 길게 내민 부분을 일컫는 말 '자지'는 표준어다. 그리고 비속하게 여겨지는 성인 남성의 성기는 공공장에서든 개인 SNS에서든 'X'로 감춰진다.

그렇다면 어째서 성인 남성의 성기 따위 가져본 적이 있을리 없는 젊은 여성이 '마음에 안들죠' 라고 한 말이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단 말일까? 말 그대로 음을 읽자면 'X같다'는 '엑스같다', 기호를 풀어 읽자면 '곱하기 같다'가 되는데. 이렇게 기표와 기의가 엉뚱하게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표현을 제대로 해야 하는 건데, ‘X’라고 바꿔 놓아도 누구나 ‘완벽’하게 그 뜻을 이해하는 맥락이라고 확신한다는 것은 참으로 폭력적이고 불가해하다.

여기서 확실한 건 하나, 허지웅이 사용한 'X'는 남근 상징권력에 주눅들어 감춰진 거세공포의 기표로서 '남성 제도권 눈치 보며 여성을 동일시해서 비하한다'는 기의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때 사용된 남근기표 'X'는 메타언어로서 그 자신의 불가능성에 대한 지표이다. 즉, 그 자체의 실정성 속에서 '거세'에 대한, 남성 자신의 결여에 대한 기표인 것이다. 여성 사이의 대화를 굳이 남근을 개입시켜야 이해 가능한 표현으로 여긴다는 것은, 여성에게 남근이 없기 때문인데, 이때 남근은 단순히 결여된 신체기관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현존함으로써 어떤 근본적인 상실을 타고난 여성을 결여된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런 여성의 표현에 ‘X’라는 신체를 부여해서 굳이 동일시할 수 있다는 오만이다.

가령 독일에서 사용되는 외설적 제스처 ‘긴 코’(die lange Nase)는 발기된 남근을 암시하는 신체 언어다. 얼굴 앞에 손가락을 펼치고 엄지손가락을 코에 대는 독일식 욕인 이 행동은 상대방이 크고 힘있는 남성의 기관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이 몸짓의 뜻은 '네 것은 상당히 크고 힘이 있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무기력하다. 넌 그것을 가지고도 나를 해칠 수 없을 걸' 이라고 해석된다. 이렇게 남근을 빌어 맥락을 만들어내는 표현은 희생자와 공격자를 동일시하는 사도마조히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권력구조의 배경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적 선동이 된다. 허지웅의 해석이 지금 대중적으로 확산되고 인용되며 다툼의 당사자인 여성 연예인에 대한 공격의 빌미가 되고 있는 현상은 바로 그런 선동의 결과다. 도대체 하지도 않은 말을 강제로 소환해 맥락화하는 이 엄청난 폭력은 마녀사냥과도 같다.

혹독한 환경에서 예능 노동을 하는 연예인들끼리 다툼이 있었다. 잘잘못도 있고 오해도 있었을 것이다. 서로 감정이 상했을 수도 있고, 그런 상황이 프로그램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을 것이다. 그게 그렇게 사람의 인격 전체를 탈탈 털어 국민 전체가 분노하게 만들만큼 커다란 죄가 되는 것일까? 가십을 상품으로 팔아 먹고사는 연예 기사들의 가학증을 ‘기레기’라고 경멸하지는 못할망정, 대중적으로 영향력 있는 평론가가 나서서 여성의 언어를 굳이 남성의 언어로 완벽하게 재해석하도록 할 정도로 문화적, 사회적으로 위험한 상황이었던 것일까?

그 여성 연예인들이 다툰 것은 당사자들로서는 참 딱한 일이지만 사회적으로 위험한 일은 아니었다. 정말 위험한 것은 그 상황이 방송관계자 누군가의 자료 유출을 통해 대중에게 공표된 것이다. 그래서 당사자들끼리의 다툼이 대중적으로 물고 뜯는 마녀사냥으로 번져 나가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다툼의 당사자인 여성 연예인들은 공개적으로 몹쓸 인간이 되었다. 사실 이들은 사소한 감정다툼이 일과 맞물리며 대중적으로 뭇매를 맞았고, 연예인의 생명인 평판과 이미지를 잃어가며 상황을 수습했었다. 그런데 악의적인 방송관계자의 자료 유출로 그나마 하던 일조차 잃을 지경에 이른 희생자다.

옛말에 이르기를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고 했다. 마무리되던 싸움에 불을 붙이고, 희생자와 공격자를 전도되게 만드는 상황은 정말이지 몹시 마음에 안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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