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홉스가 철학자의 견해대로 바라보는 정부란, 악마와 인간의 계약입니다. 그는 정부를 “전체를 향한 전체의 전쟁”을 막아내기 위해 인간 스스로 창조한 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자유를 포기하고 안전을 선택한 결과물이라고 보는 거죠. (중략) 현대를 사는 우리가 정부의 어떤 노력으로 이런 갈등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지금 살아가는 삶 속에서 체제와의 대면을 피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만의 정의와 믿음을 비호하며 살아야 합니다.”  

러시아 영화 감독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의 이 말은 그가 영화 <리바이어던>을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러시아 해안가의 마을에 살고 있는 콜랴는 아들, 아내와 행복하지만 곧 시련이 닥쳐온다. 타락한 시장이 호화 별장을 짓기 위해 그의 집을 터무니없이 싼값에 사려는 것. 법원에 호소해도 이미 시장의 손 안에 있는 검사는 기각하고, 고소장을 접수하러 간 경찰서에서는 소란 죄로 오히려 구속되고 만다. 콜랴를 도와주러 왔던 변호사 친구는 시장의 무시무시한 살인 협박에 모스크바로 돌아가고 주위의 다른 이들도 그를 돕지 못한다. 아직 굴하지 않는 골랴에게 시장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폭력을 행사한다. 

상황이 이 정도이면 더 이상 국가라고 표현하기 어려울 것 같지만 국가 권력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작심하듯이 감독은 재현한다. 영화 제목인 리바이어던(The Leviathan)은 토마스 홉스가 쓴 책 제목이자 성서 욥기에 나오는 거대한 생명체인데, 결국 이것은 통제되지 않는 국가 권력을 상징한다고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괴물이 되어버린 국가 권력에 희생되는 국민, 또는 개인의 문제. 이 폭력이 심각한 것은 국가 시스템 속에 개인이 포섭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실존주의자들의 말처럼 개인은 태어나는 순간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 던져지는데, 국가 역시 마찬가지다. 태어나는 개인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국가.  

   

▲ 영화 <리바이어던> 포스터

 

 

<리바이어던>은 국가 권력이 얼마나 끔찍하게 개인을 옭죄어오는지, 결코 서두르지 않지만 숨 막히도록 차분하게 보여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살았던 땅이고 자신이 지은 집에서 쫓겨나야할 콜랴.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의 편에 선 이들도 없다. 검경, 언론, 지방 토호, 개발업자 심지어 종교까지 권력자의 편이다. 때문에 영화를 보면 타락하고 부패한 국가 권력, 이들과 결탁한 종교, 검경, 언론, 개발업자들을 손쉽게 비판할 수 있다.(우리에게는 이런 경험이 얼마나 많던가) 부패한 권력이 있는 세상의 모든 국가와 처지에 대해서도 손쉽게 비판할 수도 있다. 특히 권력은 신에게서 나온다며 부패한 시장을 부추기지만, “당신의 고귀한 신은 어디 있느냐”라고 묻는 콜랴에게는 복종하라고 명령하는 사제를 보면 타락한 종교의 한 모습을 짐작하게 된다.  

그렇게 국가는 괴물이 되었다. 개인이 필요로 할 때 국가는 없지만 국가가 필요로 할 때 개인은 언제든 동원된다. 영화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타락한 국가 권력과 맞서 싸우는 개인의 처참한 몰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참한 몰골’이라 표현한 것은 국가 앞에 개인이 잔혹하게 파괴된다는 뜻이다. 단순히 대결에서 지는 것이 아니라 검경, 언론, 종교와 결탁한 부패한 국가 권력의 촘촘한 거미망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 절박한 어둠을 즈비아긴체프는 러시아의 아름다우면서도 쓸쓸한 해안 풍경 속에 담고 있다.  

   

▲ 영화 <리바이어던> 포스터

 

 

국가 권력 비판이라는 측면에서도 좋은 영화이지만 <리바이어던>에서 영화적으로 감탄한 것은 스토리였다. 단순하게 보면 타락한 국가 권력과 힘없는 개인의 싸움이라는 프레임으로 전개되지만, 그 대결만으로 영화를 구성하지 않았다. 초반의 강한 대결이 중반이 되면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가 다시 결말에서 이어지도록 구성해 놓았으며, 그 안에 러시아 특유의 풍습 같은 것들이 끊임없이 수놓아 딱딱한 대결 구도를 녹여내면서 풍부한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이뿐 아니다. 영화의 메인 플롯 안에 서브 플롯도 오롯이 녹아있다. 가령, 새엄마에게 저항적이지만 아버지에게는 순응적인 콜랴의 아들 로마의 이야기만으로도 좋은 성장 영화가 될 (수 있을) 정도다.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은 참으로 우아하면서 서글프다. 필립 글래스의 장중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영화의 배경이 된 북 러시아 해변이 화면에 등장한다. 해안, 파도, 바다의 단순한 장면이지만 음악과 결합되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 느낌을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아름다운 바닷가라는 느낌을 주기에는 섬뜩하고, 두렵다는 느낌을 받기에는 사람을 끄는 기이한 매력이 있다. 그 아름다움과 섬뜩함의 거리. 영화가 시작되면 이 양가적 느낌 가운데 섬뜩함이 우세한 것 같지만, 다시 비슷한 풍경으로 엔딩을 장식할 때 감히 섬뜩함의 풍경이었다고만 이야기할 수가 없다. 

   

▲ 영화 <리바이어던> 스틸컷

 

 

가령,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로마가 오래 전에 죽은 고래의 뼈 옆에서 우는 장면을 보자. 집안의 불행을 알게 된 로마는 울면서 집을 나가 무작정 바닷가로 뛰어간다. 그리고 거대한 고래 뼈가 있는 해변의 바위 위에서 운다. 이때 사운드는 우는 로마의 소리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파도 소리에 두었다. 그래서 로마의 울음은 파도에 지워진다. 쉽게 말하면, 파도가 로마의 울음을 감싸주는 것이다. 이것을 긍정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릴랴가 모스크바로 떠날 것인지 방황하는 바닷가의 장면에서도 고래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장면은 로마가 본 고래 뼈와 댓구와 대조를 이루면서(하나는 살아있고 하나는 죽었다. 이를 본 한 사람은 살아있는 어린 남성이고 한 사람은 곧 죽을 중년 여성이다) 영화적 해석을 풍부하게 만든다. 이 세련된 은유와 풍부한 스토리의 직조.

실로 오랫만에 극장에서 본 러시아 영화는 유장한 흐름을 지니고 있으면서 우아하게, 그러나 아프게 보는 이를 찌르며 다가왔다. 어쩌면 지독히도 익숙해 보이는 이야기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이야기로 만들면서도 그 안에 독특한 영상과 구조를 내장하고 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여러 생각을 하게 되고 그 생각들은 결국 하나의 엔딩으로 귀결되는데, 엔딩 후 다시 영화와 세상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단순한 사회 비판적인 영화가 아니라 우아하고 아름답지만 가슴 깊이 다가오는 사회 비판적인 영화. 섣부른 단정이 될 수 있지만, 2014년은 이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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