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명분 싸움이라는 말이 있다. 지지율이 높아도 민심이 허락하거나 납득할 수 있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당선 가능성이 없어도 명분만 있다면 민심을 얻을 수 있고 훗날을 도모할 수 있다는 얘기다.

지난 1월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하고 국민모임에 합류한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의 4. 29 재보궐선거 서울 관악을 출마 가능성이 나오면서 도마에 오르고 있다.

국민모임 쪽은 정 전 장관 출마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23일 오후 결의문까지 채택해 정 전 장관의 출마를 밀어붙이겠다는 계획이다. 국민모임 입장에서는 정 전 장관의 관악을 출마는 해볼 만한 싸움이라고 판단하고 신당의 가치와 존재를 알리는 교두보로 활용할 수 있다. 

정 전 장관이 표방하는 '합리적 진보' 노선과 국민모임의 방향은 대안 없는 제1야당을 재편시켜야 한다는데 뜻을 두고 있다. 정 전 장관은 "야당을 교체해야 정권 교체가 될 수 있다"는 국민모임 각계 대표 105인 선언에 "주저 없이 (탈당을) 결단"했다는 입장이다.(KBS 전주 TV '일요일에 만난 사람' 인터뷰)

정 전 장관은 “정치가 국민의 삶 속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그래서 사회적 경제적 약자들은 기댈 곳이 없다. 제1야당은 '우리가 너무 서민 서민 했다. 그래서 오른쪽으로 가자'고 하면서 등을 돌렸고 그 다음에 약자들을 대변할 진보 정당들은 해산되거나 분열하거나 해서 주변화 되어 버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국민모임이 야권의 대안 세력으로서 정 전 장관의 '합리적 진보'의 길로 갔을 때 정권 교체가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하지만 정 전 장관의 관악을 출마를 놓고는 얘기가 달라진다. 당장 연고가 없는 관악을에 출마하는 것이 대의일 수 있는가에 대한 반문이 나오고 있다. 명분 없는 싸움에 뛰어드는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는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 탈당 선언 당시에도 정 전 장관은 4월 재보선 출마와 관련해 "새로운 인물로 신당의 가치를 보여주겠다는 것이 국민모임 내부에서 논의된 내용"이라고 선을 그은 바 있다.

정 전 장관은 국민모임 합류는 4번째 탈당 끝에 이뤄진 것이다. 정 전 장관은 지난 2003년 민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 창당의 주역이 됐다. 노무현 전 정부에서 '황태자'로 불릴 정도로 탄탄대로를 걸었다. 이어 다시 열린우리당을 탈당해 대통합민주신당에 합류했고 대선 후보로 출마해 낙선했다. 그리고 지난 2009년 4월 전주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하지만 2012년 4월 총선에선 서울 강남을에 출마해 낙선했다. 

정 전 장관이 전주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할 당시에도 찬반 여론으로 치열한 논쟁이 일었다. 정 전 장관의 전주 덕진 출마에 대해 '지역민심은 쉬운 행보를 선택했다는 것', '지역 기득권 세력들의 밀어주기'라고 폄훼하는 반응부터 '정 전 장관은 당권싸움의 희생자', '무능한 야당을 깨우치는 명분 있는 출마'라는 찬성의 의견까지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전주 덕진에 출마하기 전 18대 총선에서 서울 동작을에 출마했던 정 전 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오만과 독선으로 특권층의 대변자로 국민을 무시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를 바로 잡는 데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자 한다"고 밝혔다. 

정 전 장관은 서울 민심 탈환에 온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동작을에서 낙선하고 전주행을 선택하자 실리만 쫓은 명분 없는 행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동작을에 낙선한 뒤 미국에 있던 정 전 장관은 워싱턴 특파원과 간담회에서 "나는 정치인이고 정치인은 정치 현장에 국민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게 내가 도달한 결론이었다"며 "내가 정치를 시작했던 곳에서 우연히 선거가 열렸고 지난번 총선 실패로 탈진한 상태에서 많은 분들이 나가라고 권유했기 때문"이라며 전주 덕진 출마 입장을 밝혔다.

정 전 장관의 전주 덕진 출마 선언에 당시 민주당은 폭탄을 맞은 모습이었다. 정 전 장관에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던 2007년 대선 낙마라는 프레임이 재연되면 민주당의 총선 전략에 차질을 빚을 것이라는 경고까지 나왔다. 하지만 정 전 장관은 "정당의 존립 이유는 집권이고 정치인의 가능성도 정당이 잘 돼야 높아지기 때문에 지금은 티끌만한 역할이라도 하고 싶다"며 출마 반대 목소리를 반박했다.

정 전 장관은 그리고 지난 2012년 4월 총선에서 전주 덕진 지역구 불출마를 선언하고 서울 강남을에 출마했다. 정 전 장관은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역사와 시대가 요구하는 길로 떨쳐나서고자 한다"며 전주 덕진을 불출마를 선언했고 "서울 강남을에 다가가 경제적으로 우위에 서 있는 시민들께 보편적 복지의 가치와 복지국가를 위한 부자증세의 필요성을 말하겠다"고 서울 강남을 출마를 알렸다.

서울 강남을 선거 구도는 정 전 장관에 나쁘지 않았다. 새누리당이 김종훈 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을 공천하면서 한미FTA 전도사와 비판론자 대결이 형성되면서 이명박 정부의 실정에 불을 붙일 수 있는 분위기였다. 정 전 장관 당시 캠프는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조국 서울대 교수 등 진보진영 인사를 앞세워 선명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김 전 본부장은 7만3346표를 득표해 4만8419표를 얻은 정 전 장관에게 20% 차이로 낙승했다. 

정 전 장관은 쌍용차 투쟁 현장, 용산 참사 현장 등을 찾아 진보적 의제를 제시온 것도 사실이지만 서울 강남을에서 낙선하면서 정치적 기반을 잃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일각에서는 정 전 장관의 낙마를 두고 스스로 정치적 기반을 버리는 행보를 이어왔기 때문에 얻은 자충수라는 비판도 나왔다. 

그리고 정 전 장관의 국민모임 합류는 그의 정치적 결단의 마지막 행보가 될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2007년 대선 낙선→서울 동작을 낙마→전주 덕진 당선→서울 강남을 낙선으로 이어진 그의 정치적 행보 끝에 국민모임 합류는 "정권 교체에 대한 밀알"이 되겠다는 정 전 장관의 진정성을 가늠하는 잣대로 작용했다. 정 전 장관의 서울 관악을 출마 얘기가 나온 것 자체부터 명분 없는 행보라는 비난이 일고 있는 이유다. 

국민모임 쪽은 정 전 장관이 출마를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결의안을 채택할 것이라고 벼르고 있다. 하지만 국민모임에 합류한 임종인 전 의원은 "정동영 전 장관의 재보선 출마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상당하다"고 말해 내부에서도 결의안 채택을 놓고 시끄러울 전망이다. 

정 전 장관의 서울 관악을 출마 카드는 현재 국민모임의 현실을 보여준 결과물이라는 분석도 있다. 정 전 장관이 국민모임에 합류했을 때만 해도 야권 재편 가능성이 제기되는 등 '반짝' 관심을 받았지만 현재 국민모임은 존재감이 크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국민적 관심을 받기는커녕 정치세력으로서 확장도 녹록치 않다. 

정치세력으로서 존재는 선거판에서 입증해야 하는데 4월 재보궐선거 지역에서 파괴력 후보를 구하지 못해 후보 발굴 난맥상을 겪고 있는 모습이다. 

국민모임이 정 전 장관의 출마 결의안을 채택하려는 것은 정치세력화 확장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당내 자원 중 정국을 돌파할 카드가 정 전 장관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철근 교수(동국대)는 "국민모임이 출범할 때 정동영 전 장관이 주도한 세력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고 그래서 본인도 ‘로우키’로 낮추고 있는 모습인데 국민모임이 보궐선거 지역에 후보도 제대로 못 세운 상태에서 그나마 당 내 여러 자원들 중 정 전 장관이 나와야 하는 게 아니냐며 현실적으로 돌파할 카드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하지만 "정 전 장관 출마에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다. 지금 승부수를 던져야할 것인지 모르겠다. 이번에도 낙선되면 완전히 정치적 생명이 끝날 수 있다"고 전망했다.

   
▲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
 

 

새정치민주연합도 채택될 결의문과 정 전 장관 쪽 분위기를 예의주시하면서 정 전 장관의 출마에 강한 불쾌감을 나타내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핵심관계자는 "대선 후보까지 했던 분이 탈당해 무소속으로 나오고 어렵게 복당까지 해서 탈당을 한 것은 무슨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명분 없는 정치적 행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관계자는 "정 전 장관의 출마는 그가 그토록 싫어했던 현 정권의 독주를 막는 게 아니라 야권 후보의 난립을 조장해서 새누리당 당선을 보장하는 가능성이 열릴 게 있게 만드는 것"이라면서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정 전 장관 출마가 현실화되면서 국민모임도 정치적 이득을 보지 못하고 새누리당 후보가 어부지리 득표로 당선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새누리당 고정 지지기반을 45%로 본다면 나머지 지지율을 야권이 얻어야 하는데 정 전 장관의 출마는 당선이 가능한 득표를 얻는 게 아니라 분열과 표 분산만 가중시킨다는 것이다. 

다만, 서울 관악을이 호남 지역민들의 정서가 강하게 남아있는 곳이고, 동시에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의 광주 서구을 출마 바람이 연쇄작용을 일으켜 서울 관악을에서도 불 경우 재보궐 특성상 관망할 수 있는 야권표가 결집할 가능성도 남아잇다. 

정 전 장관 측은 관악을 출마에 현재까지 뜻이 없다는 입장이다. 정 전 장관 측은 "원래 입장은 출마를 안 한 것으로 돼 있다. 국민모임에서 결의문 채택을 한다고 하는데 정 전 장관은 외부에서 국민모임 인재영입위원장으로서 사람들을 만나고 발굴하는데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출마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