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킹스맨:시크릿 에이전트’(이하 ’킹스맨‘)’에서 헨리 하트(콜린 퍼스)가 에그시(태런 애거튼)을 주목하는 이유는 세상을 지배하려는 발렌타인 그룹의 음모를 막을 수 있는 새로운 요원을 길러내기 위해서였다. 그는 국제 비밀정보기구 킹스맨의 핵심멤버이며, 누구보다 투철한 킹스맨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국제 비밀정보기구 킹스맨이 지향하는 스타일과 매너를 갖춘 엘리트 요원의 양성을 목표로 에그시를 가르친다. 헨리 하트는 단정한 복장에, 절제 있는 언행을 통해 상대방을 쥐락펴락 한다. 흥분하거나 이성을 잃는 일은 거의 없으며 합리적이고 냉철하면서도 여유로움을 잊지 않는다. 그는 에그시에게 스승과 다름이 없다. 그 스승은 멘토의 역할에 가까우며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듯 싶다. 에그시에게 고된 훈련의 과정이 닥치지만, 그것은 이미 충분히 예정되어 있는 일이었고, 관객들은 주인공 에그시가 돌파하리라 생각한다. 욕설을 날리거나 인격모독을 통해서 결과물을 만들어내려 하지 않는다. 정해진 룰에 따르지 않거나 부합하지 않을 때, 그에 맞는 처분을 할 뿐이다. 너무나 이상적인 캐릭터로 등장하기 때문에 현실감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한편, 영화 ‘위플래시’(Whiplash)는 킹스맨과는 반대의 관점에서 서사전개의 핵심은 스승과 제자의 긴박한 가르침과 훈련의 역학이다. 극단적으로 현실적인 즉, 하이퍼리얼리즘에 가깝다. 뉴욕의 명문 음악학교 셰이퍼의 오케스트라 지휘자 플레처 교수(J. K. 시몬스)는 신입생 앤드루(마일즈 텔러)를 최고의 드러머로 만들어줄 것처럼 말한다. 앤드루는 그의 지도에 따라 최고의 드러머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곧 그 설레임은 공포로 바뀐다. 최고의 오케스트라는 만들고 싶은 플레처는 단원들에게 갖은 욕설과 인격모독 행위를 서슴지 않고 가한다. 물론 주인공 앤드루에게도 마찬가지다. 뺨을 수십 차례 때리는 행위는 수치심과 모욕감을 배가시킨다. 플레처의 지도법은 모두 주관적이다. 아무도 그의 기준을 알 수도 없고 따라갈 수도 없어 보이지만, 혹독한 트레이닝은 계속된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단원들을 수시로 교체하는가 하면 서로 간에 경쟁심은 물론 질투심을 유발시켜 주관적 목적을 달성 시키려 한다. 심지어 그가 지도했던 학생은 정신장애에 시달리다가 남들이 부러워한 위치에 올랐음에도 자살하고 만다. 하지만, 플레처는 잠시 눈물을 보이는가 싶더니 자신의 행보를 이어간다. 최고의 오케스트라는 만들기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번민과 갈등 속에서도 앤드루가 성취를 해내는 것처럼 이끌어 간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앤드루도 욕망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 킹스맨:시크릿 에이전트 스틸컷
 

이 영화의 강점은 빤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 그리고 그에 따른 교훈적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긴장과 급박한 전개가 몰입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과만 좋다는 인식은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을 수밖에 없다. 스파르타식으로 훈육하며 입시성적만 좋고 나중에 학술적인 호기심은 전혀 배가 시키지 못하는 입시 교육의 단점은 생각지 못하게 하는 듯 싶다. 이렇게 목적과 수단의 뒤바꿈을 합리화하는 스승 캐릭터는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드라마에도 등장한다.

KBS 수목드라마 ‘착하지 않은 여자들’에서 교사였던 나현애(서이숙)는 제자 현숙(채시라)에게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일삼는다. 예컨대 단적으로 다음과 같은 말에서 알 수 있다.

“네가 억울하게 퇴학당했다 해도 멀쩡한 애였으면 검정고시를 보고 졸업장을 땄을 거다. 멍청해서 중졸로 남은 게 누구 탓이야?”

또한 스승의 날 모임에서 나현애는 자신의 교육 방법 때문에 너희들이 사회에서 모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에 모인 제자들은 크게 긍정하며 ‘스승의 은혜’ 노래를 합창한다. 여기에서 이탈한 현숙은 쓸쓸하게 뒤돌아 설뿐이다. 나현애는 사회적으로 성공할 것 같고, 사회적 배경이 있는 학생들을 총애하며 현숙과 같이 성적이 뒤처지거나 힘이 없는 학생은 내친다. 심지어 학교에서 쫓겨나도록 만든다. 제자들의 성공은 모두 자신 때문이며 자신은 위대한 교육자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을 경쟁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것은 물론 위험에 처한 것도 모른 체 한다.

물론 나현애 같은 교사에게 찬사를 보내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플레처와 다른 점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나현애와 달리 플레처를 바라보는 눈은 다르다. 오히려 찬탄을 한다. 이 영화가 수많은 상을 받은 것은 플레처 때문이다. 또한 결국 그를 따라 결과를 이뤄낸 엔드루였다.

   
▲ 위플래쉬 스틸컷
 

우리 내면속에는 나현애가 없는 것일까. 나현애와 플레처가 다른 것은 나현애에게는 최고의 실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실력을 갖춘 제자를 만들어내는 과정에 대해 찬탄을 하는 관객들이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최고의 실력이라는 목적을 위해 인권과 교육 가치를 망각하는 행위까지 합리화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살을 한 제자 따위는 곧 잊어버리는 플레처다. 그의 교육방법에 대해 전혀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엔드류가 주도권을 잡아 공연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것으로 플레처에 저항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영화의 전반적인 기조를 폭력적인 교육의 합리화였고, 결국 엔드루도 그에 따른 교육적 결과를 만든 셈이 되었다.

플레처가 가르친 것은 드럼에 대한 기능적이 숙달이었다. 그리고 엔드류가 원한 것도 그것이었다. 삶이나 행복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또한 음악을 통해 다른 이들, 관객들에게 좀 더 좋은 음악을 들려주겠다는 생각 따위 자체가 없었다. 오로지 자신이 뛰어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고, 그 뛰어남의 기준은 플레처와 같이 매우 주관적이 자폐적일 수밖에 없었다. 듣는 관객들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케스트라가 왜 존립하는지에 대한 사유가 없는 것과 같았다. 이 작품을 위대한 영화로 꼽는다면 우리시대의 사회구성원의 사고는 바로 자기중심적인 자폐의 틀에 갇혀 있는 것과 같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회적 가치는 희생할 수 있다는 독재 사회의 망령은 바로 그 순간 탄생하는 법이다.

   
▲ 착하지 않은 여자들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즐겨라. 너의 삶을 남다르게 만들어라!(Make your lives extraordinary.)”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처럼 죽은 시스템 속의 기능적 교육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가치와 행복에 충실 하라는 스승 상이 플레처와 같은 괴물로 수용되는 사회가 된 모양이다. 스스로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라 폭력성과 기계화를 수용하는 괴물이 되어서라도 최고가 되고 싶은 욕망이 갈수록 더욱 심화되는 것은 비단 플레처 개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글로벌 경쟁 구조는 그러한 상황에 우리 모두를 내몰게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드러머가 도대체 얼마나 창조적일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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