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던 시절에 저지른 일로 죗값을 치렀으며 자식이 알까 두렵다”(조직폭력배 일제단속 기사에 실명 노출)
“기사는 허위사실이고, 무죄로 확정됐다. 지워달라”(대학로 카페서 음란비디오 상영)

30년 전 내가 한 일이 아직도 포털사이트에서 검색된다면? 특히 한 번 기사화되면 사실상 당사자의 삶에 영원히 꼬리표로 남는다. 언론사들이 오보의 피해자나 법원 판결로 무죄가 확정된 피의자 등 ‘묵은 기사’에 한해 ‘잊혀질 권리’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이유다.  

국내언론에 프라이버시 개념이 도입된 것이 1950년대 후반이며, 법적으로 다뤄지기 시작한 시기는 1990년 이후다. ‘잊혀질 권리’를 보장하는 법은 언론중재법,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정보통신망법), 개인정보보호법 등이다. 언론중재법은 보도 후 6개월 안에 정정보도·반론보도·추후보도·손해배상 등 4가지 청구권을 인정하고 있다. 정보통신망법에 따라 삭제요청이 들어오면 플랫폼 운영자는 온라인 게시물을 30일 동안 블라인드 처리하거나 삭제해야 한다. 개인정보보호법에서도 정보 주체가 개인정보 처리자에게 개인정보의 정정 삭제를 요구할 수 있는 개인정보삭제권이 있다.  

하지만 ‘잊혀질 권리’가 도입된 지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지만 한국 언론사들이 이를 적용하는 기준은 여전히 뒤죽박죽이다. 이 권리에 대해 연구해온 한겨레 구본권 기자는 최근 논문 <저널리즘 관점에서의 ‘잊혀질 권리’와 언론구제피해 연구>에서 사례분석과 언론사 종사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언론사들의 비일관성을 지적했다. 

첫 번째 사례는 가수 태진아씨의 간통 혐의를 보도했던 동아일보, 경향신문, 매일경제의 1975년 보도 및 이후 기사 수정 결과다. 당시 이 신문들은 간통혐의 피의자 태진아와 상대방 여성의 이름과 주소를 공개했다. 이후 동아일보는 두 사람의 이름은 공개하되 주소만 비공개했고, 경향신문은 태진아씨의 이름만 공개하고 나머지는 다 가렸다. 매일경제는 이름과 주소를 다 가려 기사만 보면 누구에 대한 내용인지 알 수 없게 했다. 

이 신문들은 이 기준을 다른 기사에서도 적용했을까? 아니다. 경향신문은 1990년 수협 회장 홍문종씨의 부정선거 사건을 다뤘던 1면 톱기사에 대해선 제목과 본문에 나온 홍씨의 이름과 수협이란 단어를 가려줬다. 동아일보는 제목과 본문에서 홍씨의 이름과 수협을 삭제했으나 홍씨의 얼굴 사진과 이름은 그대로 남겨뒀다. 한겨레와 매일경제는 아무 것도 수정하지 않았다.

   
 
 

묵은 기사에 대한 수정 규정은 언론사마다 다르다. 언론사들은 언론중재법 6조에 따라 고충처리인을 두고 활동내역을 1년 단위로 공개하고 있다. KBS·MBC·SBS·중앙일보·국민일보·세계일보 등이 정한 기사 수정이 가능한 시한은 언론중재법의 ‘보도 후 6개월 이내’보다 짧다. 고충처리센터도 유명무실하게 운영되는 곳이 적지 않다. 세계일보의 2013년 처리실적 0건이고, 문화일보는 2005년부터 2014년 7월까지 처리실적이 없다. 상당수 방송사는 1년에 몇 건 신청이 들어와 처리했다는 단순통계만 공개하고 있다.  

반면 연합뉴스‧국민일보‧동아일보‧조선일보‧중앙일보‧한겨레는 접수 사안의 구체적인 내용과 처리결과까지 공개했다. 연합은 보도된 지 6개월 넘은 기사에 대해서도 민원이 들어오면 기사를 수정한다. 조선일보는 요청자에게 처리 여부를 알리고, 수정된 기사 하단에 고지하지만 피해구제 요청 기사를 보도된 지 60일 이내의 기사로 제한했다.   

해외 언론은 오히려 기사삭제에 대해 엄격한 편이다. 뉴욕타임스는 기사 삭제는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대신 수정하고, 기사 아래 ‘정정’ 알림을 통해 어떤 내용이 언제 수정됐는지 밝힌다. 뉴욕타임스는 블레어 기자가 수년간 수십 건의 날조 표절기사를 쓴 일명 ‘제이슨 블레어 기사 사건’이 2003년 일어나자 독자들에게 사과했지만 블레어 기자의 기사를 삭제하지 않았다.  대신 기사 상·하단에서 기사가 표절 날조였음을 알렸다. 뉴욕타임스는 오자 등 단순오류를 정정할 때도 기사 아래에 정정사실을 표기하고, 워싱턴포스트지도 지면 기사가 온라인에서 수정될 경우 어떤 내용이 언제 수정됐는지 알린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도 마찬가지다. 

   
▲ 구본권 한겨레 기자
 

언론사에서 기사 삭제가 공공연히 이뤄지고 있지만 내부 기준과 절차보다 재량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은 구본권 기자가 논문에서 전한 언론계 종사자들과의 인터뷰에서도 알 수 있다. 한 인터넷 신문은 개그맨에서 가수와 탤런트로 변신하면서 성형수술한 연예인이 자신의 과거가 인터넷에 알려지는 게 부담스럽다며 삭제 요청을 하자 공적 가치가 크지 않고 개인에게 피해가 된다며 기사를 삭제했다.

공무원 자살 사건을 보도한 한 통신사의 기자는 유족의 삭제 요구에 ‘사실보도는 고쳐줄 수 없다’고 생각해 버텼지만 지금은 유족의 심정이 이해되고, 기사화하더라도 표현에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사에 대한 외압도 재량에 의한 삭제에 포함된다. 한 경제지 기자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 경영 전략을 비판하는 기사를 썼지만 해당 기업 CEO가 간부에게 여러 차례 불쾌감을 표시하자 자신의 동의 없이 기사가 삭제됐다고 말했다.

구 기자의 인터뷰에 응한 언론사 종사자 21명 가운데 11명은 기사삭제청구권 신설에 찬성했고, 10명은 반대했다. 찬성 논리는 “수용자 권익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반영해줘야 한다”, “악용 가능성을 막기 위해 절차와 투명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 등이다. 반대 논리는 “언론 자유가 위축될 소지가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 팩트 확인이 어려운 경우가 있다” 는 것이다.  

구 기자는 언론사의 ‘잊혀질 권리’ 수용 실태에 대해 “묵은 기사에 대한 삭제 요청은 그에 대한 언론사의 임의 처리 문제는 예외적이거나 시간 경과에 따라 자연스럽게 해결될 사안이 아니라 갈수록 확대될 문제”라며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저널리즘의 기능과 가치를 재논의하게 만드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구 기자는 이 문제에 대한 언론계에서의 공론화와 함께 저널리즘 윤리 차원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구 기자는 “기존에 기사 삭제는 기준 없이 언론사별로 임의적으로 처리됐는데 이는 비공개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묵은 기사를 수정‧삭제할 경우, 보도 당시와 마찬가지로 공개적으로 처리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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