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서 ‘대한항공 승무원 미국서 소송낸 이유’에 대한 보도를 보면 너무 일방적이고 불공정하다. 게다가 왜 미국 법정으로 갈 수 밖에 없는지 국내법 운영과 판례의 문제점에 대한 분석은 없이 대한항공측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언론마저 공정은 커녕 재벌이나 조직의 편에 서서 약자나 피해자를 더 곤경에 빠트리는 모습을 그대로 보고 있기가 때론 힘들다.

대표적인 기사가 세계일보의 3월 13일자 “대한항공 승무원 미국서 소송낸 이유, 명예회복보다는 거액의 배상금?”이라는 제목이다. 이 보도에서 세계일보는 “대한항공측은 12일 국내에서도 재판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재판 관할권도 분명치 않고 언어와 법도 익숙하지 않은 미국에서 소송을 제기한 점이 석연치 않다”는 대한항공측을 대변했다.

이 신문은 “미국에서 재판을 받을 경우 보다 많은 배상금을 타낼 수 있기에 이를 의식한 것 아니냐”는 회사측의 입장을 전달했다. 또 대한항공은 "소송 대상으로 조현아 전 부사장뿐 아니라 대한항공을 지목한 이유도 이해하기 힘들다"고 했다.

이 신문은 다른 관련기사에서 “대한항공은 K씨에게 수십억원에서 백억원 이상을 물어줄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까지 벌써 내놨다. 세계일보는 국제뉴스에 비교적 경쟁력을 갖고 있으며 좋은 정보를 서비스하는 편이다. 하지만 대한항공과 관련된 뉴스에서 피해자인 K씨의 입장이나 주장 등은 제대로 반영되지도 않았으며 최소한의 반론권조차 없다.

   

▲ 세계일보 3월 13일자 인터넷 기사

 

 

미국에 소송을 낸 이유를 대부분 언론에서 손해배상금때문이라고 보도한 것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우리나라 법과 법원이 억울한 피해자, 희생자를 법으로 제대로 보호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은 없다. 인간의 존엄이 짓밟히고 인격권에 심대한 손상을 입어도 한국법과 법원은 소송해봐야 실익이 없을 정도로 푼돈으로 소송 자체를 좌절시킨다.

미국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거액으로 피해를 보상해주라는 취지,punitive damage)'를 운영하는 것은 사회적 강자들로부터 소시민인 개인의 인격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한번 상처받은 인간적 모욕과 상처를 ‘사과’ 말한마디로 떼우지 말고 돈으로나마 보상해주라는 취지다. 한국의 천박한 자본주의는 정신적 피해, 상처를 푼돈으로 보상하는 둥 마는 둥 판결을 내리고 있는 형편이다.

조현아는 이미 두 피해자에게 일억씩 공탁금을 걸었다. 그 1억을 가져가면 합의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인간적 모멸과 수치심은 물론 향후 직장을 떠날 수 밖에 없는 피해자들에게 1억씩 갖고 떨어져라는 식의 액수에 대한 비판은 없다.

오히려 대한항공측이 "소송 대상으로 조현아 전 부사장뿐 아니라 대한항공을 지목한 이유도 이해하기 힘들다"는 얼토당토 않은 주장을 부각시키고 있다. 왜 대한항공 회사가 소송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는가. 기자도 동의하는가.

기내 행패는 조현아가 했지만 그후 국토부 조사에서 거짓 증언을 유도하거나 교수직 제의하며 회유를 시도한 것은 조현아가 아니라 대한항공 회사의 이사 등 중역들이었고 그 때문에 그들은 현재 감방에 있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대한항공 회사가 부분 책임을 져야할 당사자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는데 왜 대한항공의 일방적 주장만 있고 피해자의 입장은 없는가.

더 큰 문제는 국내에서 개인이 거대 조직을 상대로 소송하게 되면 개인이 이기기 힘들기 때문이다. 대한항공과 그 계열사가 갖고 있는 법조계 출신 변호사, 임원들의 연줄에 따른 막강한 파워는 허약한 정의를 침몰시킬 수 있다. 법원에서는 항상 정의가 승리하지 않는다. 변호사로부터 이해관계에 있는 여검사가 벤츠 선물을 받았지만 ‘사랑의 징표’로 친절하게 해석해주는 곳이 또한 한국의 대법원이다.

한진그룹, 대한항공이라는 막강한 조직을 상대로 한 개인이 국내 법원에 소송을 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자가 더 잘 알 것이다. 기자가 이번 사건의 피해자라면 한국 법원을 택할 것인가 미국 법원을 택할 것인가.

   
 
 

또한 국내소송은 장외 전쟁이 더 어렵다. 법정소송 과정에서 언론의 과열 취재나 지인을 동원한 각종 로비 등 소송 당사자를 굴복시키기 위한 모든 수단이 동원될 것은 불문가지다. 대한항공 피해자들은 이미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고 향후 직장을 떠나야 할 처지에 있다. 그들을 동정하지는 못해도 국내법원을 외면한 이유를 단순히 돈때문이라고 매도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것보다는 국내법에도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원용하도록 촉구하고 법원에서 정신적 위자료나 손해배상금 액수를 현실화 하여 진정한 법치주의가 실현되도록 주장하는 것이 더 절실하다. 직장에서 덜떨어진 상사로부터 인간적 모욕을 당하는 경우가 어찌 대한항공뿐이겠는가. 국내 법과 법원은 개인의 존엄과 인격권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며 ‘최후의 보루’는커녕 ‘강자들의 해결사’역할에 그치고 있다. 법관을 믿지못해서가 아니라 국내 기업의 로비가 너무 강력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할 수 없는 것은 남에게도 요구하지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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