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 피습사건 이후 화제가 된 책이 하나 있다. 돈 오퍼도퍼 존스홉킨스 대학교 교수의 책 <두 개의 한국(The Two Koreas)>다. 로버트 오그번 주한 미 대사관 공보참사관은 8일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열린 브리핑 자리에서 리퍼트 대사가 <두 개의 한국>을 정독 중이라고 밝혔다.
<두 개의 한국>은 워싱턴포스트 기자로 한반도 문제를 오랫동안 취재한 돈 오퍼도퍼가 기술한 책이다. 97년 나온 1판에 로버트 칼린 전 국무부 동북아 담당관이 2001~2013년 상황을 덧붙여 지난 2014년 개정판이 나왔다.
왜 병상에 있던 주한대사는 하필 이 책을 정독했을까. 이 책 전반에 흐르는 메시지는 바로 ‘한미관계는 변화한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이 한국을 지켜줬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리퍼트의 쾌유를 기원하며 부채춤까지 추는 분들에게는 ‘불편한 진실’일지 모르겠지만 한국과 미국은 영원한 우방이 아니라는 것.
▲ 7일 오전 10시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한성총회 소속 신도들이 서울 파이낸스 빌딩 앞에서 리퍼트 대사의 쾌유를 기원하는 부채춤 공연을 펼치고 있다. 사진=노컷뉴스 | ||
베트남 전쟁 이후 리처드 스나이더 주한대사는 “남한이 여전히 미국에게 의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더 이상 속국은 아니다”며 한미관계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본국에 촉구한다. 한반도에서 손을 떼라는 의견까지 있다. 안보에 위협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을 추진한다.
“카터의 턱 근육이 조용히 씰룩거리는 것을 보았다. 카터가 잔뜩 긴장하고 있을 때면 으레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이와 동시에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있던 박 대통령은 자신의 말이 한마디씩 끝날 때마다 손가락으로 탁자를 쳐서 탁탁 소리를 냈다. 이 역시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를 받으면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박 대통령의 버릇이었다. 밴스는 카터의 차가운 분기(憤氣)로 회의실 전체가 냉랭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이 무려 45분 동안 자신의 입장을 장황하게 전달하는 동안 카터는 밴스와 브라운 국방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메모를 전달했다. “만일 박정희가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한국에서 미군을 전원 철수시키고 말겠소.”라는 내용이었다. 카터는 그 자리에서 바로 반론을 제기하는 대신 잠시 회의를 중단하고 박 대통령과 함께 옆방으로 자리를 옮긴 후 계속 대화를 나눴다. 밀폐된 장소에서 카터는 남한의 인권문제를 제기한 뒤 경제적으로 북한보다 훨씬 부강한 대한민국이 군사적으로 북한을 따라잡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홀브룩 당시 국무부 차관보가 “당시 한-미 양국 정상 사이의 대면은 동맹국 정상간의 회담이라고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고 평할 정도로 당시 한미관계는 냉랭했다.
오퍼도퍼는 5.16 쿠데타와 12.12 군사반란을 예로 들며 미국이 과거의 권위주의 청산하고 좀 더 민주적인 정치체제로 진입하도록 유도해봤지만 그 노력이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고 말한다. “남한 내 정치인들에게 사활이 걸린 문제에서만큼은 미국의 영향력이 상당히 제한돼 있음을 깨달았다”
“5.16 쿠데타와 마찬가지로 79년 12.12 반란은 미국이 무언가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이미 기정사실이 돼버렸다. 5.16 당시 미 대사관 측은 한국의 민선 정부를 계속 지지하겠다는 발표를 통해 상황을 역전시켜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참담한 실패로 돌아갔다”
▲ 두 개의 한국 / 돈 오퍼도퍼, 로버트 칼린 지음. | ||
오퍼도퍼는 이어 노태우 정부,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을 살피며 그것이 미국과 미묘하게 어긋난 지점들, 미국과 한국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미국과 한국은 북한을 앞에 두고 협력과 갈등을 반복한다. 북한은 이 묘한 틈을 파고든다. 오퍼도퍼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한미관계가 바람 잘 날 없이 항상 흔들렸다는 사실이 아닐까. 96년 9월 강릉잠수함 침투사건 때도 그랬다.
“한‧미간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서 남한에 있던 미국 관리들은 양국 사이에 존재하는 커다란 견해차를 우려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달라진 분위기를 상징하는 한 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군 장교들이 북한 잠수함 조사를 위해 현장에 파견된 한 미군 무관에게 조사를 허락하지 않으려 했을 뿐 아니라 마지못해 허락한 후에도 조사를 마치고 잠수함을 떠날 때 몸수색을 받게 한 것이다. 이에 미국 대사관은 즉각 항의했다. 미국 정부의 분석가들은 남한 정부의 조사내용을 담은 보고서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미국이 <두 개의 한국>을 한미관계의 ‘바이블’로 삼고 주한대사가 이 책을 정독한다는 점을 보면 미국은 한미관계를 냉정히 판단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반면 한국 정부는, 나아가 한국의 정치세력은 한미관계를 냉정히 보고 있을까.
이 책을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추천하고 싶은 이유다. 남은 3년간 대북정책, 나아가 외교 정책을 결정할 때 ‘한미관계는 계속 변화 한다’는 이 책의 메시지를 유념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장 ‘사드 배치’라는 큰 쟁점이 있다.
▲ 박근혜 대통령이 9일 오전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의 병실을 방문해 위로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제공 | ||
박 대통령에게 <두 개의 한국>을 추천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 책의 마지막, ‘후기’ 때문이다. 이 책의 ‘후기’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진심어린 조언이 담겨 있다.
“박근혜는 50년 전 아버지가 직면했던 문제들만큼이나 심각한 사회적‧정치적 문제 해결의 압박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만큼 오래 집권해서 문제를 해결하거나 아버지가 누렸던 만큼의 권력을 누릴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1961년 당시보다 발전된 경제를 자랑하는 한국을 물려받았다. 북한에 대한 태도는 단호해지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의 남한의 역할은 굳건해졌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 동안 국민들이 의지해왔던 남한의 거의 모든 기반이 위험에 처한 듯 보인다. 빠른 경제성장의 기적에 대한 자축과 한 세대 전 이뤄낸 평화적인 문민정부로의 전환은 이미 과거의 유물이 되어가고 있다”
“대한민국 내부와 외부의 정치인과 비평가들은 하나같이 지난 30년 간 남한이 북한을 앞섰다는 사실만을 강조하며 남한을 북한과 비교해왔다. 양국 간 차이가 있다는 점은 새롭지 않으며, 모든 사람들이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차이에 집중하면 사실은 남한이 잘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감추는 격이 되고 만다. 한 가지 비극적 예를 들자면 남한의 자살률은 모든 OECD 회원국의 자살률보다 훨씬 높다. 이 암울한 통계수치에 대한 많은 해석이 있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왜 이런 수치가 나오는지 설명할 필요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