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리퍼트 주한대사 피습 사건이 ‘종북몰이’로 이어지고 있다. 용의자 김기종(54)씨에게는 살인미수는 물론 ‘국가보안법’ 혐의까지 적용됐고, 새누리당과 보수언론은 종북좌파들의 소행이라며 시민운동단체들과 야권까지 엮기 시작했다. 신중해야 한다는 분위기의 미국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지난 5일 오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 중이던 리퍼트 대사가 김기종씨의 공격을 받아 얼굴 등을 다쳤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주최 조찬 강연회에서 25cm 길이의 과도로 리퍼트 대사의 얼굴과 왼쪽 손목 부위를 공격했다.

김기종씨는 통일운동단체 ‘우리마당통일문화연구소’ 대표를 맡고 있다. 김씨는 경찰에 붙잡힌 뒤 “오늘 테러했다. 유인물을 만들었다. 전쟁 훈련에 반대해서 만든 유인물”이라고 밝혔다. 김씨는 ‘전쟁 훈련 반대’라는 구호를 외쳤다.

   
▲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민화협 초청 특별강연회에서 마크 리퍼트 주한미국대사를 흉기로 습격한 우리마당 김기종 대표가 종로경찰서에서 적십자병원으로 이송되며 전쟁 훈련 반대를 외치고 있다. 사진= 노컷뉴스
 

범행동기도 안 밝혀졌는데…‘종북’에 ‘노무현’까지 등장

통일단체 대표인 김씨가 ‘전쟁훈련 반대’를 외치며 미국 대사를 공격했기 때문일까. 정확한 범행동기가 밝혀지기 전부터 김씨의 배후세력을 의심하는 추측이 쏟아졌다.  

권은희 새누리당 대변인은 5일 브리핑에서 “김기종씨는 해산 결정을 받은 통합진보당이 속해 있던 ‘전쟁반대 평화실현 국민행동’의 일원”이라며 “대법원으로부터 이적단체 판결을 받은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우리민족연방제통일추진회의 등도 이곳에 포함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이인제 새누리당 의원은 같은 날 최고위원회의에서 “배후를 아주 신속하고 철저하게 수사해 밝혀야 한다”며 “현재 보도되는 바에 의하면 아마 범인은 반미, 종북 세력의 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인제 의원이 언급한 ‘보도’란 조선, 동아, 문화일보 등의 보도다. 김기종을 종북, 그리고 통일단체들, 나아가 야권과 연계시키는 보도가 쏟아졌다. 조선일보는 5일 ‘단독보도’를 통해 김기종씨의 저서 <독도와 우리 그리고 2010년>의 내용을 전했다. “국회나 정부에 내가 키운 사람들이 많다” “우리마당이 참여연대, 경제실천연대, 환경연합 등 시민단체의 산실(産室)”이라는 것이 그 내용이다.

조선일보는 “김씨는 2012년 8월 국회 정론관에서 우상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이해학 성남주민교회 원로목사, 강지원 전 민주당 부대변인과 함께 일본 방위백서 발표에 대한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며 김씨와 이들이 함께 찍힌 책자 속 사진을 실었다. 조선일보는 다른 기사에서 김씨가 “국회의원 등 인적 네트워크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그는 야권 관계자들과 상당한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조선은 또한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전 의원 보좌관과 통합진보당 공동대변인 등을 맡았던 우위영씨도 김씨의 활동을 두고 ‘지혜와 안목이 실로 놀라울 따름’이라며 지지 성명을 낸 것으로 돼 있다“고 덧붙였다.

문화일보는 5일 리퍼트 대사 습격사건을 전하는 기사에 ‘리퍼트 습격 범인, 노무현 시절 6차례 방북’이라는 제목을 걸었다. “경찰은 김 씨가 노무현 정부 시절 6차례 북한을 방북한 것으로 알려져 공안당국이 주시해온 만큼 범행 이유, 공범 및 배후 세력 여부 규명에 주력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TV조선도 8일 비슷한 보도를 했다. “김기종 우리마당 대표는 노무현 정부 4년간 통일부 통일교육위원으로 활동했다. 무보수 명예직이긴 하지만 정부가 이 같은 직함을 내줬기에 김기종은 북한에 8차례 방문하는 등 수월하게 대외 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것. 이런 종류의 보도는 김기종을 ‘종북’, ‘노무현’으로 엮는 ‘일타 쌍피’의 효과를 지닌다.

그러나 정작 통일부는 김기종씨의 방북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통일부에 따르면 김씨는 99년 금강산 관광을 위해 개인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했고, 2006년 11월부터 2007년 4월까지 민화련(민족화합운동연합) 소속으로 개성을 여러 번 방문했다. 식목 행사 참여를 위해서다. 또한 김씨가 통일교육위원 직함을 유지한 것은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까지다. 그의 방북을 종북으로, 또 노무현 정부가 그의 뒤를 봐준 것처럼 보도하는 데 무리가 있다는 뜻이다.

행사를 주관한 민화협과 김씨를 엮는 보도도 나왔다. 몇몇 언론에서 민화협이 진보단체로 알려졌으나, 민화협은 진보·보수를 어우르는 단체다. 친박으로 알려진 홍사덕 전 의원이 상임의장으로 재직했고(이 사건 이후 사퇴), 친박 이성현 전 새누리당 의원이 공동의장을 맡고 있다.

그러자 민화협이 진보세력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6일 채널A <시사인사이드>에 출연한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보수의 입장에서 불그스레한 사람들이 민화협 집행부를 장악하고 있다”며 “98년부터 18년째 집행부는 전혀 안 바뀐다. 말이 좋아서 진보와 보수 아우르는 거지 보수 입장에서 봤을 때 골수 좌파들로, 보수들은 들러리”라고 강조했다.

   
▲ 채널A 갈무리
 

사건 이후 이성헌 의장이 민화협 대변인 자격으로 기자회견을 맡고 있는 것과 관련, 황씨는 “이성헌 공동의장은 뭔지도 모르고 이야기하는 들러리에 불과하다”며 “대공 용의점을 가지고 민화협을 들여다봐야 하는데, 이 전 의원이 왜 총대를 메는지 기가 막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진보세력이 민화협을 움직인다는 말이 사실과 다르다는 반론도 있다.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 평화통일위원회에서 활동하는 김성복 목사는 10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민화협은 보수와 진보를 망라한 통일단체로 출발했으나 행태의 보수성으로 ‘통일연대’라는 진보성향 단체가 만들어졌고, 종교인들은 ’7대 종단‘의 이름으로 독자적 목소리를 냈다”며 “이걸 보더라도 민화협에 보수단체 중심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속은 진보가 차지하고 있다는 주장은 여론을 호도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종북테러’가 된 피습사건… 답 정해놓고 수사하는 검경?

범행동기도, 북한과의 관련성도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어느새 피습사건은 ‘종북’의 테러가 됐다. 피습사건 다음 날인 6일 조간신문은 ‘종북’으로 뒤덮였다. “한미동맹 찌른 종북테러”(조선일보) “종북, 한미동맹을 테러하다”(동아일보) “종북주의자의 사상초유 미 대사 백주 테러”(매일경제)  “리퍼트 대사, 종북주의자에 피습”(세계일보)

중앙일보과 동아일보는 7일 김기종씨의 주장이 북한의 선동과 닮았다며 “그의 주장과 북한의 대남 선동 내용과 유사하다” “검경이 김씨에 대해 국보법 위반 혐의 적용을 검토하게 된 것은 김씨가 단순히 이번 테러뿐 아니라 그동안 통일, 반미 활동을 하면서 북한의 대남선동 언동과 유사한 주장을 해왔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새누리당도 6일부터 피습사건을 종북주의자의 소행으로 규정하고 야권과의 연결고리를 찾았다. 김무성 대표까지 나섰다. 김 대표가 8일 리퍼트 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이번 사건은 종북좌파들이 한미동맹을 깨려는 시도”라고 강조한 것.

같은 날 박대출 새누리당 대변인은 “김씨가 어엿한 시민운동가로 행세한 데는 야당 의원들과의 교류가 한몫했다”며 야당 책임론을 거론했다. 박 대변인은 “야당이 종북과 손잡은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통합진보당이 국회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도 야권의 묻지마 연대 때문”이라며 진보당 이야기를 꺼냈다. “종북숙주에 대한 참회론을 쓸 때”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 윤명성 종로경찰서장이 6일 오전 서울 종로서 브리핑실에서 마크 리퍼트 주한 미대사의 피습사건 관련 수사 브리핑을 하고 있다.경찰은 피의자에 대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 적용 여부를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왼쪽부터 이규문 서울경찰청 수사과장, 윤 서장, 안창수 종로서 형사과장 ⓒ연합뉴스
 

한 야권 관계자는 “마치 김기종이 종북이길 바라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새누리당과 보수언론이 리퍼트 대사 피습사건을 정치쟁점화하며 시민운동단체들은 물론 야권까지 몰아세우고 있다는 뜻이다. 4월 재보선까지 이 쟁점을 끌고 갈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또 다른 야권 관계자는 “이번 일을 계기로 사드 배치나 테러방지법까지 밀어붙이려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종북몰이 이후 박 대통령 지지율이 오랜만에 상승세를 탔다. 리얼미터는 9일 “중동 순방과 주한 미국대사 피습 사건을 둘러싼 종북 논란으로 보수층이 결집하며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가 40%에 근접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피습 다음 날인 6일 지지율은 40.3%까지 올라갔다. 같은 여론조사에서 지난 1월 14일(40.6%) 이후 약 한달 반만의 일이다.

수사기관도 새누리당과 보수언론의 외침에 발맞춰 움직이고 있다. 검찰과 경찰은 총 112명에 달하는 인력으로 수사본부를 꾸렸다. 2013년 원전비리 수사단(102명), 방산비리 합동수사단 규모(105명)보다도 많은 숫자다.

수사본부는 또한 김기종씨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파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수사본부는 김씨의 자택에서 압수한 물품 중 이적성이 의심되는 북한 서적 등 30점에 대해 감정을 의뢰했다. 수사 결과가 언론에 흘러나오면서 김씨와 북한을 연계시키는 보도가 더 쏟아질 것이다.

정치권과 언론이 ‘종북’으로 답을 정해놓은 상황에서 수사본부가 독립적인 수사를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중동 순방 중인 박근혜 대통령은 6일 “어떤 목적에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단독으로 했는지 배후가 있는지 모든 것을 철저히 밝혀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라”고 주문했다.

피습사건을 대하는 새누리당과 보수언론의 태도가 정부여당에 불리한 이슈를 다룰 때와는 상이하다는 지적도 있다. 노동당은 8일 “대선 댓글 개입, 채동욱 전 검찰총장 개인정보 열람 등 일이 터질 때마다 개인적 일탈을 내세우던 정부가 유독 이 사건에서만은 배후세력, 종북을 말하는 이유가 뭔가”라며 “내가 하면 개인적 일탈, 남이 하면 종북인가”라고 비판했다.

한국과 달리 차분한 미국, 국익은 어디에?

미국의 반응은 한국과 사뭇 다르다. 미 국무부는 5일 이후 이 사건을 ‘분별없는 폭력행위(senseless violence)’, ‘공격’으로 규정했다. 테러로 규정할 경우 보복행위 등 추가 조치가 필요한데다, 동맹국에서 ‘배후’가 있는 테러가 발생했다면 한미동맹에도 악영향이기 때문이다.

반면 새누리당 의원들과 보수언론은 이를 ‘종북 세력의 테러’로 규정하고 있다. 이런 규정이 오히려 국익에 해로울 수도 있다. 피습사건이 김씨의 개인행동이 아니라 종북세력의 테러이고, 북한과도 연계돼 있다면 한미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외교부가 이번 사건을 테러가 아닌 ‘가해 행위’로 규정하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한 것도 같은 이유다. 앞으로 미국과 외교안보 이슈 협상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 결국 국내정치에 이용하기 위해 국익을 해친다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 7일 오전 10시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한성총회 소속 신도들이 서울 파이낸스 빌딩 앞에서 리퍼트 대사의 쾌유를 기원하는 부채춤 공연을 펼치고 있다. 사진=노컷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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