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정부. 군인이 아닌 민간인 출신의 대통령이 통치하는 정부를 일컫는다. 대한민국은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정민국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32년 동안 군인출신이 통치했다. 정민국 정부에서 시작된 군사정권은 두민국 정부로 이어졌고 1987년 6월의  민주항쟁 덕분에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되었지만 역시 군인 출신의 태민국 대통령이 군사정권의 맥을 이었다. 그러다 금년 2월25일에야 민간인 출신인 영민국 대통령이 취임함으로써 군부에 의한 권위주의 통치는 막을 내렸고 바야흐로 문민정부가 시작됐다.

국회의원들이 국정을 논의하는 장소인 국회의사당이 현 위치인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1번지에 둥지를 틀고 문을 연 것은 지난 1975년 9월1일이었다. 현 의사당 건물의 터는 1968년 제7대 국회에서 정해졌고, 1969년 7월17일 제헌절에 즈음해서 기초 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기간은 장장 6년이었으며 시멘트 64만 부대와 벽돌 850만 장이 들어갔고, 공사현장엔 연인원 1백만 명이 동원되었다. 

1948년 5월31일에 회기를 시작한 제헌국회는 서울시 세종로에 있는 중앙청(中央廳)의 중앙홀을 의사당으로 사용했다. 중앙청 건물은 원래 일제 총독부 청사였다. 일제는 1916년 식민통치의 위엄을 과시하려고 경복궁 근정전(勤政殿) 앞에 총독부 청사를 세워 사용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 청사엔 대통령 집무실을 비롯한 주요 행정부처가 자리 잡았다. 이 건물은 중앙행정관청의 역할과 기능을 계속하게 되었는데, 중앙행정관청의 준말인 중앙청은 권부(權府)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중앙청은 일제 침략의 상징적 건물이기에 주요 정부기관의 집무실로 사용할 수 없다는 여론에 따라 1986년 6월, 23개 전시실을 갖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회의원들도 서울을 떠나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한국전쟁 당시엔  대구의 문화극장, 부산의 문화극장과 부산극장 등이 의사당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엔 다시 서울의 중앙청 중앙홀과 시민회관 별관, 그리고 서울시청 뒤에 있던 대한공론사(大韓公論社) 등을 의사당으로 사용한 바 있다. 대한공론사는 1953년 8월에 창간돼 영자신문과 해외 홍보용 책자 등을 발행하다가 1978년 9월에 폐간한 언론사다. 

유신헌법(維新憲法). 1972년 10월17일에 선포된 유신체제하에서 개정된 제4공화국의 헌법이다. 정민국 대통령은 종신(終身)집권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 헌정 사상 일곱 번째로 헌법 개정을 시도했다. 초헌법적인 국가긴급권을 발동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동시에 전국적인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뒤, 10일 이내에 헌법개정안을 작성해 국민투표로써 확정하도록 지시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유신헌법은 약 한 달 뒤인 1972년 11월21일 국민투표로 확정되었다.

3년 뒤인 1975년 초가을,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준공되었다. 준공식을 보름 앞둔 그 해 8월17일엔 독립운동에 투신한 언론인 겸 정치인으로 제7대 국회의원을 지낸 바 있는 장준하 선생이 경기도 포천의 약사봉에서 의문의 사고로 사망했다.   

이러한 질곡의 현대사는 물론이고 국운이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던 근대사, 그리고 유구한 고대사를 묵묵히 지켜보며 유장하게 흘러 온 한강의 하류엔 작은 섬이 몇 개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여의도다.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있는 한강의 하중도(河中島)인 여의도(汝矣島). 작은 샛강을 사이에 두고 영등포 가까이에 떠 있는 이 섬은 원래 모래땅의 범람원이었다. 불모지나 다름없던 이 섬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6년이었다. 일제가 간이비행장을 건설함으로써 여의도는 우리 역사에 그 이름을 아로새기기 시작했다. 

1936년 김포비행장이 건설된 이후에도 여의도비행장은 그대로 존속되었다. 8․15광복 이후에는 한때 미군이 사용했고, 공군본부가 여의도기지에 자리 잡게 됨으로써 여의도비행장은 한국공군의 발상지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한국전쟁 뒤엔 잠시 국제공항으로 이용되기도 했던 여의도비행장의 공항기능은 대부분 1950년대 후반에 김포공항으로 넘어갔다. 10년 쯤 지난 1960년대 후반, 여의도에서는 윤중제(輪中堤)공사가 시작되었다. 이를 계기로 여의도는 오늘과 같은 상업·금융·주거지구로 발전하게 되었다. 1970년에 서울대교, 1981년에 원효대교가 완성됨으로써 여의도의 발전은 눈부신 속도로 이루어졌고, 수도 서울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높아졌다.

조선시대에 ‘양화도’, ‘나의주’ 등으로 불렸다는 여의도가 대한민국 현대사에 중요한 섬으로 바뀌게 된 또 하나의 계기는 그 옛날의 양말산 터에 들어선 국회의사당이 만들어 주었다. 1954년부터 1975년까지 태평로의 시민회관 별관에 있던 국회의사당을 여의도로 옮긴 정민국 대통령은 1971년 여의도에 드넓은 광장을 조성했다. 지금은 ‘여의도광장’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원래의 명칭은 ‘5․16광장’이었다. 약 8개월간의 공사를 거쳐 1971년 9월12일에 준공된 5․16광장은 길이 1,350m, 폭 350m, 넓이 11만4천 평으로 공식적인 수용규모는 55만 명이었다. 하지만 이 광장에 사람이 가득 들어차면 2백만 명도 수용이 가능했다. 당시 세계 최대의 아스팔트 광장을 정민국 정권이 조성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유사시에는 이 광장을 전투기의 이착륙이 가능한 임시 비행장으로 삼고, 국군의 날에는 이 광장에서 군사퍼레이드를 벌일 작정이었다. 그리고 반공궐기대회 등 대규모 집회장소로 사용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지난 8월, 한 일간지엔 정민국 정권 당시 서울시 도시국장으로 여의도개발의 실무책임자였던 서울S대 S교수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S교수에 따르면, 정민국 대통령은 펜을 들고 직접 광장을 설계했다는데, 당초 서울시가 제시한 광장의 이름은 ‘민족광장’과 ‘통일광장’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민국 대통령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즉석에서 ‘5․16광장’이라고 직접 이름을 지었다고 증언했다. 

이렇게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정민국 대통령은 자신이 일으킨 군사정변의 이름을 따서 광장의 명칭을 지었지만 또 다른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제5공화국의 두민국 대통령은 제3공화국과의 단절을 보여주려고 ‘5․16광장’의 이름을 ‘여의도광장’으로 바꾸었다. 

이런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여의도의 강바람은 오늘 유난히 매서웠다. 엊그제 상강(霜降)이 지난 탓도 있겠지만 밤새 내린 겨울비 탓인지 휘몰아치는 강바람은 행인들의 얼굴을 얼리고 어깨를 움츠러들게 할 만큼 차가웠다. 초겨울의 서리를 머금고 있는 세찬 강바람이 고층빌딩 사이에서 회오리치면서 울부짖는 궂은 날씨 속에서도 여의도를 활보하는 국회의원들의 목은 대부분 뻣뻣하게 굳어 있고, 두 어깨는 한껏 올라가 있었다. 청사(靑史)에 남긴 자신의 발자국은 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어제 국회의사당에서는 박철식 의원과 김종말 의원의 석방 요구안에 대한 찬반투표가 실시되었다. 두 결의안은 각각 159표, 151표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이날 표결엔 169명의 J당 의원이 참가했지만 석방을 반대하는 반란표가 박 의원의 경우 최소 10표, 김 의원의 경우 최소 18표나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박철식 의원은 전 정권인 태민국 정권에서 황태자로 불렸던 정계의 거물이다. 문민정부 초기에 몰아친 사정 태풍 때 슬롯머신 사건과 관련, 거액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바 있다. 김종말 의원 역시 D은행장으로부터 거액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었다. 

제14대 국회의원 299명은 지난 해 5월30일 임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벌써 상당수가 여의도를 떠났다. 어떤 의원은 임기시작 3개월 8일만에 투표함 재점검결과 당선 무효판결을 받은 바 있다. 지난해 12월에 치러진 14대 대통령 선거와 영민국 정권 출범 이후 정치권에 휘몰아친 재산공개 등 개혁태풍 속에서도 여러 명의 국회의원들이 여의도를 떠났다. 그 가운데 J당에서 나와 당적을 K당으로 바꾼 박철식 의원과 무소속으로 남게 된 김종말 의원은 현재 옥고를 치르고 있다. 

그런데 박철식 의원과 김종말 의원에 대한 석방요구안을 집권당인 J당 의원들조차 거부했다. 사실 J당 의원 상당수는 영민국 정권의 강도 높은 개혁이 법치보다 인치에 치중하고 특히 사정과 관련해 표적수사가 이뤄졌다고 지적해 왔다. 그런 가운데 두 의원에 대한 석방요구안을 청와대와 J당 수뇌부가 제기하자 10~20명 정도의 의원들이 당론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이에 청와대는 난처한 입장을 보였는데, 이번 여당의 반란표가 영민국 대통령의 개혁몰이에 심각한 타격을 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어제 본회의를 앞두고 J당 수뇌부는 당내 의원들의 반란표를 방지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본회의 직전에 가진 J당 의원총회에서 김종일 대표는 “감성은 느낌이며 이성은 해야 한다는 당위이고 오성은 깨달음”이라며 “개혁을 위해 오성에 따라 판단해 달라”고 의원들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누구를 위하고 무엇을 위한 개혁인지는 모르겠지만 청와대와 집권당인 J당의 지도부는 개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사정의 칼날을 맘껏 휘둘러왔다. 하지만 개혁을 부르짖는 청와대와 J당을 바라보는 민심은 싸늘할 뿐이었다. 

영민국 정권은 출범 직후 과거청산을 큰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여당인 J당은 과거청산의 깃발을 벌써 내린 듯하다. 기대했던 야당 또한 여론을 좇는다는 명분으로 과거청산을 포기한 것 같다. 12․12군사쿠데타와 5․16군사쿠데타 문제를 집요하고 파고들고, 5․18광주학살의 주범들을 단죄하는 일에 앞장서겠다는 국회의원은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다. 이순신과 김만수는 이런 국회의사당으로 달려가 몇몇 국회의원들에게 서해훼리호 참사의 원만한 수습을 거론하며 교도소에 있는 조희오의 석방을 도와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뻔한 일이었다. 

“야, 만수야, 넌 여그 국회의사당을 보면 먼 느낌이 드냐?”

“금수회의소 같은디요, 금수들이 모여서 국가와 민족 문제는 뒷전이고 오직 지들 자리를 지키고 입신출세와 부귀영화만 생각허면서 허구헌 날 다투는 회의장 말이오!”

“금수회의소라… 짐승들이 모여서 쌈박질만 히쌌는 회의장이라…”

위도활빈당 대표를 맡고 있는 이순신은 어제 오후 서울에 왔다. 어제 오전에 부안경찰서 유치장에서 전주교도소로 이감된 조희오를 석방시킬 방법을 찾기 위해 상경했다. 어젯밤 늦게 서울에 도착한 이순신은 구리시에 살고 있는 김만수네 집에서 잠을 자고 국회 의원회관을 찾아갔다. 몇 명의 야당 의원들을 만나 얘기했는데, 의원들마다 반응이 시큰둥했다. 

“씨발 새끼들, 지들이 머 벨것인 줄 알고 만나는 놈마다 하나 같이 개폼을 잡고 건방을 떰서러 어서들 나가 줬으믄 좋것다는 눈빛이던디. 야, 만수야! 서울 남대문 시장엘 가면 으디 총을 파는디 읎냐? 기관총을 한 자루 사다가 저 금수회의소다 들이대고 확 갈겨버리고 싶은디.”

이순신이 국회 정문 앞에다 가래침을 타악 뱉으며 악담을 쏟아내자 김만수는 힘을 잔뜩 넣은 눈으로 국회의사당을 노려보았다.  두 사람이 늦은 점심을 먹으려고 국회의사당 정문 앞 금산빌딩 지하로 내려갈 때 쯤, 길 건너 한강변에 있는 금수호텔 로비에서는 김두길과 김동필이 서성이고 있었다.

“희진이 이눔이 말여요, 요새 서울 사는 동창들허고 전화통화를 헐 때 마다 내 욕을 바가지로 헌다는디, 형님, 희오 문젤 앞으로 어떻기 허믄 좋것소?”

금수호텔 커피숍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김두길은 짜증스런 목소리로 이렇게 묻지만 김동필은 대꾸가 없다.

“형님도 아시겠지만 제가요, 희올 풀어 달라고 철수 형님헌티  부탁한 것이 열 번은 넘고요, 금수 형님헌티도 다섯 번이나 전활히서 신신당불했는디요. 그런디도 두 사람이 희오 석방을 못 시킨 걸 보면 암만혀도 청와대나 안기부가 풀어주지 말라고 헌 것이 분명해 보이는디, 고런 줄도 모리고 희진이 이놈이 내가 나쁜 놈이라고 친구들헌티 소문을 내고 있는디 이것 참말로 미치고 환장허것네요!”

굳어 있는 김두길의 얼굴을 바라보던 김동필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을 이어갔다. 

“요새 안기부 아그들은 어쩌 콧빼기도 안 빈다냐? 요새끼들이 또 무신 짓꺼리를 벌이고 있는 것 아녀?”

“그러게 말여요. 참사 직후엔 고놈들이 나헌티 벨의벨 주문을 다 혔고, 최 선장 시신이 인양되기 전까지만 해도 수시로 연락을 혀서 이것저것 캐묻고 말도 안되는 부탁을 했쌌더니만 요샌 내가 한번만 만나달라고 사정을 해도 요것들이 내말을 씹어버리는데요. 어이고 씨발, 고 양아치 같은 새끼들을 믿은 내가 바보제!”

김두길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꺼내 물자 김동필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야 두길아, 안기부 새끼들헌티 우덜이 팽당헌 것 아녀?”

김두길이 깊게 삼켰던 담배 연기를 천천히 뱉어낸 뒤 대답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시상 인심잉께 안기부도 그러고요, 맹철수나 김금수도 그럴턴디, 우덜을 똥개 부려먹듯 허다가 쓸모가 없어지믄 언지든지 헌신짝 버리득기 팽시키것지요. 그런게 그 누구든 믿지 맙시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믄 우덜만 아픈께!”

“암만 암만, 하느님도 못 믿고 부처님도 못 믿고 내 처자식도 못믿을 시상인디, 씨발 우덜이 고깟 도의원허고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믿고 살어서는 안 될 것이고만!”

고개를 끄덕이던 김두길이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근데요 형님, 한나만 물어 봅시다. 금수 형님이 KS훼리 사장 아들놈허고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소릴 으디서 들었소?”

김동필이 즉답을 피한 채 행여 누가 들을까 겁나는지 주변을 살피는데 커피숍 안으로 들어오는 스포츠머리의 20대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 쟈가 누구여? 두길아, 쟈가 말이여, 혹시 벌금 일수 조카 아니냐?”

김동필의 말에 김두길도 그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청년은 김두길과 김동필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탁자로 다가왔다. 

“아니 딴치도 두길이 아저씨허고 동필이 어르신 아닌가요?”

그 청년이 먼저 아는 체를 하고 인사를 올리자 김동필이 물었다.  

“아니 너 벌금 훈철이 아니냐?”

“네, 훈철이 맞는디요, 두 분이 여긴 어쩐 일이대요?”

“어, 여그 커피숍서 국회의원을 좀 만나기로 혀서 지둘리고 있다. 근디 넌 여그 어쩐 일이냐?”

김동필이 묻자 정훈철이 대답했다.

“헤헤 지가요, 재작년에 군대 제댈혔는디 가방끈이 짧다 봉게요, 취직을 헐라고혀도 으디 갈 디가 없던만요, 그리서 신당동에 있는 행국이 아자씨네 봉제공장서도 일을 해보고 멩동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웨이타도 히봤는디요. 적성에 안맞더만요. 그리서 멫달 놀다가 여그 호텔 지하에 있는 싸우나서 작년 여름부터 일을 허게 됐는디요. 헤헤 저도 섬놈이 틀림없는지 물을 만지는 일이 적성에 딱 맞으니, 요것이 참말로 무신 조화 속인지 모리것네요. 헤헤헤…”

겸연스레 웃던 정훈철이 물었다.

“아니 근디 여그서 으떤 국회의원을 만나기로 힜다요?”

“어, 김금수 의원이라고 허는디…”

김동필의 대답에 정훈철의 입이 귀에 걸렸다. 

“헤헤 김금수 의원요? 헤헤 저도 고 양반허고 억수로 친헌디요. 두 분도 고 양반허고 친허요?”

“우리야 고 양반허고 십년이 넘게 관곌허고 있다만 니가 고 양반을 어찌끼 아냐?”

“헤헤 이 금수호텔 싸우나엔 이 나라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방송국 기자님들, 피디님들, 그라고 영화배우나 탈렌트도 많이들 오는디요. 다들 싸우나 안이서는 깨 할딱 벗고요. 꼬치를 내놓고 털레털레 왔다갔다 허다봉께 서로들 친 헐 수밖에 읎지라우, 헤헤헤!”

이렇게 너스레를 떨던 정훈철이 웃음을 멈추고 제안했다.

“저기요, 아까 봉께 김금수 의원이 싸우나에 있던디요, 지가 들어가서 후딱 모시고 나올꺼라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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