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민 모두는 지난 18대 대선을 앞두고 권력기관의 정치적 편향이 어떠한 것인지를 적나라하게 목격한 바가 있다. 2012년 12월 11일 당시 민주당이 국정원 직원의 오피스텔을 급습하면서 국정원 직원의 댓글 의혹을 제기하며 국정원의 조직적 선거법 위반을 폭로하였다. 이에 대해 경찰은 전혀 상반된 두가지 양상을 보였다. 당시 김용판 서울경찰청장은 12월 16일 늦은 밤, 이례적으로 대선후보 관련 댓글을 확인할 수 없다는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하였다. 김용판 전 청장의 중간 수사결과는 첨예하게 다투던 선거법 위반 문제에 대해 당시 박근혜 후보에게 면죄부를 주어 결과적으로 대통령으로 당선되는데 일조를 하게 된다.

한편, 당시 수사책임자이었던 권은희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은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으로부터 수사결과를 축소하라는 외압을 받았다고 폭로하였다. 김용판 서울청장의 중간 수사결과 발표를 뒤집는 것이었다. 자칫 묻힐 뻔 했던 엄청난 조직적 음모가 한 사람의 용기있는 말 한마디에 의해 만천하에 드러났다. 많은 국민들은 권은희 과장의 용기있는 행동에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해가 바뀌어 총선이 다가오자 사직을 하고 새정치민주연합으로부터 공천을 받았다. 이 때 대선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던 많은 국민들은 권은희 과장의 공천이 자칫 외압폭로에 대한 대가로 비쳐질 소지가 있다며 반대했으나, 결국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권은희 과장은 당선 이후 이상하게도 대선 부정선거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어 대가 의혹이 잦아들지 않고 있다.

김용판 전 서울청장은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다 1월 29일 대법원으로부터 무죄를 선고받았다. 반면 서울경찰청의 선거법 위반 수사의 단초를 제공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선거법 위반 혐의로 법정 구속된 상태이다. 불법행위를 한 사람은 구속되었으나, 이 불법행위를 수사한 결과 불법이 없다고 외압을 행사한 것으로 의심은 받는 사람은 무죄를 선고받는 희한한 일이 발생했다. 한편 권은희 의원은 시민단체로부터 위증혐의로 고소를 당해 김용판 전 청장과 입장이 엇갈린 상태이다. 우리는 세칭 권력기관인 경찰과 국정원의 책임자들이 정치적 중립의무를 위반하여 고소를 당하고, 구속되는 생생한 사례를 보았다. 

며칠 전 김용판 전 서울청장이 대통령의 고향인 대구에서 내년 총선 출마를 준비 중이라고 언론에 보도되었다. 퇴직한 경찰관이 총선에 출마하는 것이야 자유이지만, 자칫 권은희 의원과 마찬가지로 박근혜 당선에 대한 보답으로 공천을 받는다는 의혹이 또 생기지 않을까 우려된다. 사실 김용판 전 청장은 선거법 위반에 대해 죄가 없다기 보다는 검찰에서 혐의를 충분히 입증하지 않아 무죄를 받게 하였다는 의혹까지 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또한 권은희 의원의 위증혐의 고소 사건에 대해 김용판 전 청장의 무죄 선고와 반대되는 선고가 있을 수도 있다. 

우리가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보았듯이 권력기관의 정치적 중립은 대단히 중요하다. 여야가 팽팽하게 대립하는 과정에서 권력기관의 한마디는 당락에 직접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선거가 끝난 다음 그 결과를 바로잡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정치권은 권력기관을 끌어 들여 선거에서 이득을 챙기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전 국민을 상대로 부정선거를 하는 것 보다 권력기관으로 하여금 합법을 가장하여 상대 후보 발목잡는 것이 워낙 쉽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권은 권력기관을 끌어 들이는 대가로 승진을 약속하거나, 퇴직 후 공천 약속을 제시할 수도 있다. 또한 권력기관 스스로 선거에 관여하여 공로를 세우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의 세 결집 움직임이 부산하다. 선거 대비하여 고향 또는 학교 후배를 해당 지역 권력기관 책임자로 앉히려 한다는 소식까지 들린다. 지난 대선 때 권력기관의 정치적 편향과 비슷한 양상이 또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다시는 권력기관의 정치적 중립의무 위반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정치권의 들러리가 되어 구속과 석방의 어리석은 행태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현행 국가공무원법에는 공무원의 정치운동을 금지하고 있다. 즉 공무원이 타인에게 특정 정당 또는 특정인을 지지 또는 반대하도록 권유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위 사건과 같이 특정정당 또는 특정인을 유리하게 하는 행위를 직접 한 경우에는 명확한 제재규정이 없다. 공무원의 금품비리에 대해 철퇴를 내리는 김영란법과 같은, 권력기관의 정치적 편향 행위를 단죄하는 명확한 입법이 필요하다. 정치권이 선거에서 권력기관을 이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고, 정치적으로 편향되고 싶어하는 공무원의 행태에 경고를 내리는 길이 될 것이다.

< 필/자/소/개 >
채수창 한국시민안전연구원 대표는 경찰대학 1기 출신으로 화순경찰서장을 끝으로 지난 해 2월 퇴직하고, 현재는 아동·청소년 안전지도 교육, 범죄예방을 위한 환경디자인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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