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몰린 자의 패륜적 배신인가? 준비된 우국의 거사인가?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한 재판 결과는 전자였다. 1980년 당시 대법 재판부의 다수의견은 중정부장이던 김 부장이 70년대 말 정치적 정국 수습책이 거듭 실패 해임설이 나돌자 지위에 불안을 느끼는 등의 이유로 행한 내란죄로 판결 내렸다.

그를 체포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합동수사본부측은 김재규를 아버지를 살해한 패륜아라고 표현했다고도 한다. 경북 구미 출생으로 박 대통령과 동향 출신인 그는 5.16 군사쿠데타 당시에는 오히려 반혁명군으로 몰려 감금됐으나 박대통령의 배려로 풀려나 오히려 호남비료 사장이 되었고, 6.3 사태 당시 계엄군 사령관으로 박 대통령의 신임을 얻어, 육군방첩대장, 국회의원, 건설교통부장관, 중앙정보부장의 지위에 이르렀다. 그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임과 배려가 남달랐던 것이다. 김 부장 역시 2심 최후변론에서 박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해 “친형제간도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그런 만큼 인지상정의 관점에서 전두환측이 말한 ‘패륜아’라는 표현이 전혀 틀린 말이라 할 수도 없는 일이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을 쓰러뜨린 10.26사태의 총성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삶까지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사진은 1979년 당시 김재규 중정부장이 박 전 대통령 시해사건 현장 검증하는 모습. ⓒ 연합뉴스

 

 

하지만 김재규는 박 대통령 저격에 대해 ‘차원’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펼쳤다. 그는 박 대통령 저격을 민주회복을 위한 계획적인 혁명이었다고 주장했다. 1972년 유신체제 선포된 직후부터 유신헌법 자체가 국민의 주권을 찬탈한 반민주적 행위라고 판단했고, 박 대통령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줄곧 해 왔다는 것이다. 그는 옥중 수양록 등에서 관련 내용을 자세히 밝혔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1972년 10월 유신이 반포된 직후 자신이 사령관으로 있던 3군단을 박 대통령이 시찰할 때 그를 감금하고 하야를 권고하려고 계획했으나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또한 1974년 9월 18일 건설부장관 사령장을 받으러 가면서 바지 주머니에 권총을 넣고 청와대에 들어갔으며, 1975년 1월 27일경 대통령의 건설부 초도 순시 때도 권총을 숨겨두고 기회를 엿보았다. 1979년에 들어서는 부마사태로 정국이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상태로 접어들자 궁정동 안가에 육해공군 참모총장을 불러 대통령을 제거할 기회를 엿보았으며, 마침내 10월 26일에야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대법원에서 내란죄로 사형판결이 확정되고 말았지만, 당시 14명의 대법관 중 무려 6명의 법관이 이 같은 김 부장의 주장을 염두에 둔 듯 신군부에 맞서는 소수의견을 냈다. 이들은 사건 이후 ‘유신헌법’이 개정되고 새 체제하에서는 다른 판단이 내려져야 한다며 내란목적의 살인이 아니라 자연인 박정희를 살해한 단순 살인죄일 뿐이라는 판단이었다. 이들 대법관들은 결국 전두환 신군부세력에 의해 강제로 옷을 벗어야 했다.

박정희와 김재규처럼 인류의 역사에서 권력자와 그를 시해한 측근의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브루투스 너마저도”란 말로 유명한 로마제국의 시이저와 브루투스의 이야기도 대표적인 사례다.

이같은 이야기들처럼 권력자의 생물학적 생명을 끊게 한 것은 아니지만 권력자의 지위를 박탈시켰다는 점에서 방송가에서 김재규나 브루투스에 비유되는 사람이 있다. 바로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이다. 김 국장은 지난해 5월 세월호 희생자들을 교통사고 희생자에 비유한 발언으로 세월호 유가족의 격분을 일으켰고 거센 지탄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길환영 KBS사장과 청와대측은 정치적 위기에 내몰리게 된다. 청와대는 길 사장에게, 길 사장은 김 국장의 퇴진 압력을 행사했다. 그는 퇴진압력을 받은 후 기자회견을 열고 보도국장 재임 시 길 사장을 통해 이뤄졌던 청와대의 인사 및 보도 개입의혹을 폭로했다. 길 사장이 자신의 자리보전을 위해 외압의 통로가 되어 KBS의 독립성을 훼손했다는 사례와 주장을 펼쳤다. 김 국장의 기자회견을 기화로 KBS 기자들이 길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제작거부에 들어갔고, KBS 이사회는 결국 길 사장을 해임하기에 이른다. 김시곤 국장의 기자회견 폭로가 김재규 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쏜 총탄처럼 길 사장을 쓰러뜨린 것이다.

   

▲ 지난해 5월 9일에 열린 김시곤 KBS 보도국장의 긴급 기자회견. 김 전 국장은 이 자리에서 길환영 사장을 비판하며 퇴진을 주장했다. ⓒ 연합뉴스

 

 

KBS내의 보수성향의 노조인 KBS공영노조는 김시곤 전 보도국장에 대해 “길환영 전 사장이 이끄는 경영진에 사실상 참여한 인물이면서 길환영 전 사장의 경영을 비판한 배신적 행위를 했다”고 비난했다. 김재규를 패륜아로 평가한 신군부처럼 그를 인간적으로 나쁜 사람으로 평가한 것이다. 길 사장을 쓰러뜨린 김 국장은 김재규 부장처럼 일종의 재판을 받게 된다. 후임 사장체제가 들어선 KBS는 그에게 품위유지 등 사규위반을 들어 정직 4개월의 징계를 내린다. 보수 노조에서는 그의 폭로가 ‘내부고발자 코스프레’라고 혹평하며 4개월 정직이 너무 가벼운 징계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김 국장은 생각이 달랐다.

김 전 국장은 자신에게 내려진 징계 4개월의 정직에 대해서 부당징계무효소송을 지난해 말 회사를 상대로 내고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그는 소송에 앞서 사내에 올린 글에서 “언론 공기업인 KBS는 일반기업에 적용되는 사법의 영역인 상법과 그 하위의 사규 외에도 공법의 영역인 헌법(언론의자유), 방송법(공정성 준수)등의 지배를 강하고 받고 있다”며 “언론의 자유나 공정성과 관련된 사안은 사규라는 잣대보다는 헌법과 방송법 그리고 방송강령과 방송편성규약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밝혔다. 그가 전임사장을 비판한 행위는 오히려 언론의 자유와 공정성 준수라는 헌법과 방송법을 위반하고 위임된 권한을 개인의 이익을 위해 남용한 길환영 사장을 견제한 정당한 행위였다는 것이다.

KBS 새노조의 한 인사가 전한 김 전 국장의 주장에 따르면, 보도국장을 맡은 이후 1년여 동안 사장을 통한 청와대 등의 외압에 대해 꼼꼼하게 기록해왔으며, 외압에 휘둘리는 길 사장을 비판할 생각을 평소에 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날의 기자회견도 단순히 자신의 퇴진요구에 격분한 우발적 행동이 아니라 보도국의 인사들과 상의한 계획된 거사였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김재규 전 부장이 72년 유신선포 이후 수차례 거사를 계획했던 것과 비견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권력자를 제거한 측근의 대한 평가는 그의 행위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각자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를 믿고 발탁한 사람에 대한 배신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된다. 반면 공직자의 충정은 권력자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국가와 조직의 대의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오히려 의인이 된다. 김재규 부장과 닮은 점이 있는 김시곤 전 보도국장은 배신자일까? 아니면 의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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