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문조사를 함께 할 곳을 찾으려고 텔레마케터처럼 며칠 동안 수십 곳에 전화를 돌렸다. 설문조사 문항 설계도 늦었고 생소한 영역이라 회수율이 높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어 마음이 조급했던 거 같다. 설문 조사 분석 결과가 나오는 날까지도 걱정했다.”

설을 앞둔 2월 17일 KBS 시사기획 창은 <‘직장 내 괴롭힘 보고서’ 인격 없는 일터>편을 방송했다. ‘직장 내 괴롭힘’이란 ‘회사의 인사 명령이나 업무 지시로 인해 노동자가 정신 건강을 해칠 만큼 괴로워 하는 상황’ 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 ‘쯤’인 이유는 국내에 명확한 법 규정이나 사회적 합의가 없기 때문이다. 국내 최초로 진행한 직장 내 괴롭힘 설문조사에서 시사기획 창은 7개 업종 5922명을 설문했다. 유효 응답자만 4589명이다. 

해당 방송을 준비했던 김연주 KBS 탐사보도팀 기자를 지난달 27일 서울 영등포구 KBS 본사 앞 커피숍에서 만났다. 김연주 기자는 탐사보도팀 소속 5명 중 막내 기자로 이번 프로젝트를 약 4개월 간 준비했다. 

김연주 기자는 그 기간 중 설문조사 응답률에 가장 신경이 쓰였다고 했다. 그는 “설문응답자가 통계적으로 유효한 700명만 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응답률이 높았던 건 올해 초 ‘땅콩회항’ 사건 때문 아니었나 싶다”고 했다. 

   
▲ KBS <시사기획 창> '직장 내 괴롭힘 보고서, 인격없는 일터' 도입 화면.
 

 

국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영역에 대한 설문조사인데다 설문 문항 자체도 어려워 응답률에 대한 걱정이 가장 컸다는 게 김연주 기자 설명이다. 설문조사는 노르웨이 버겐 대학 ‘세계 따돌림 연구소’가 개발한 ‘NAQ-R’(부정적 경험 설문지)를 번역해 사용한 것으로 단어의 속뜻을 응답자가 받아들일 수 있느냐의 문제도 걱정의 한 축이었다. 업무 배제, 따돌림 등 큰 항목은 22개였지만 질문 내용은 실제로 50여개에 이르러 응답자가 집중도를 가지고 답변할 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현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설문조사 시작은 전국민주노동조합 산하에서도 다양한 직종이 포함된 전국공공운수노조 소속 조합원 대상이었다. 조합원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설문조사는 비조합원의 동참을 이끌어 내더니 산별을 넘어 보건의료, 서비스연맹 등으로 번졌다. 

결과는 설문응답자의 16.5%가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것. 국제적인 수치보다 평균 1.5배 높았다. 김연주 기자는 “성장 위주의 기업 문화나 경기 침체로 인한 구조조정, 비정규직 차별 등이 괴롭힘 상황을 낳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아쉬웠던 것은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것이 국내에서는 퇴사 압박용으로 흔히 사용된다는 점이다. 해외와는 다른 경향이다.  

“해외 사례 대부분은 ‘직장 내 괴롭힘’이 개인 간 1:1 괴롭힘이다. 퇴사 목적으로 괴롭히는 게 아니라서 ‘우아한 괴롭힘’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국내는 조직에서 누군가를 배제하기 위해 괴롭힘이 이용되다 보니까 굉장히 구조적이다. 두 가지 모두 다루고 싶었지만 시간상 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

고생한 작업 중에 방송에 시간 관계상 방송에 내보내지 못한 것도 있다. 방송 초반에 등장하는 빨간 우체통. 이 우체통에는 직장 내 괴롭힘을 호소하는 노동자들의 편지를 받았다. 이 편지를 프랑스 아비뇽에 위치한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 지원센터’에 의뢰했다. 센터 전문가 3명은 이 편지에 일일이 응답했다. 

   
▲ 프랑스 아비뇽의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 지원센터'의 베르통셀리 센터장, 아나브 변호사, 로드리게스 박사(왼쪽부터)는 국내 피해자들에게 보낸 연하장에서 공통적으로 '자책하지 말라'며 '직장 내 괴롭힘은 당신이 문제라서가 아니다'고 적었다.
 

 

김연주 기자는 “이 분들이 일일이 손편지로 연하장에 답을 했는데 모든 답변의 공통점은 ‘당신 탓이 아니다’, ‘자책하지 말라’ 그리고 ‘이렇게 편지를 쓴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는 거였다”며 “한국에서는 흔히 ‘남의 돈 빼먹지 쉽지 않다’고 하면서 감정을 무시하는데 한번쯤은 내 괴로움이 당연한 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이런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확산됐으면 좋겠다는 뜻도 내비쳤다. 

“직장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원인은 굉장히 여러 가지다. 그런데 책임은 항상 가장 말단 노동자가 지는 구조다. 그에게는 정신적인 스트레스까지 더해진다. 우리는 왜 회사 구조가 잘못됐거나 상품 구조가 잘못됐다고 말하지 못하는 걸까. 아랫사람 탓만 하는 사장님도 자아비판을 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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