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차기 비서실장으로 이병기 국가정보원장을 임명했다. 현직 국정원장이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가는 경우는 처음이다. 

이병기 비서실장은 지난해 6월 국정원장으로 임명될 때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논란이 가라앉지 않으면서 이를 수습하기 위해 '구원투수'로 내보낸 사람이 이병기 국정원장이었지만 오히려 정치 공작 전력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이 비서실장은 "정치개입 네글자를 지우겠다"고 했지만 과거 북풍공작 사건에 개입한 의혹이 일면서 오히려 과거보다 정권에 유착한 국정원이 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과 이 비서실장의 관계는 지난 2004년 이 비서실장이 한나라당 전략기획위원장으로 발탁되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특보를 하면서 이인제 의원에게 불법정치자금을 전달한 것이 드러나면서 한나라당 당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2005년 2월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상임고문을 맡으면서 정치권으로 복귀해 박 대통령의 자문그룹으로 활동했다. 2007년엔 박근혜 후보 캠프 선대위 부위원장을 밭았다. 지난 대선에서도 박 후보의 자문을 맡았다. 박 대통령 정부에서 이 비서실장은 주일대사로 임명됐다. 

이 비서실장은 박근혜 정권을 만들기 위한 '전략통'에 가까운 인물이지만 과거 정권에서 많은 정치 공작에 개입한 전력이 있다.

야권에서 문창극 총리 후보자의 친일 발언에 가려 있었지만 이 비서실장이 국정원장으로 내정됐을 때 오히려 문 후보보다 주목해야할 ‘위험한 인물’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 비서실장은 지난 1997년 대선 당시 국정원 안전기획부 2차장으로 있을 때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김 후보와 북한이 연계돼 있다는 재미교포 윤홍준씨의 기자회견을 안전기획부가 꾸민 사건이 벌어졌다. 이 비서실장은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지만 기소되지 않았다.

이 비서실장은 일명 차떼기 사건에도 연루돼 있다. 2002년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정무특보로 활동하면서 이인제 의원이 이 후보를 돕도록 수억원의 돈을 차떼기 방식으로 전달했다. 정치 공작을 위해 일명 돈심부름꾼 역할을 한 것이다. 

과거 여러 정권의 문고리 실세를 맡아온 것도 눈에 띈다. 이 비서실장은 지난 1981년 노태우 전 대통령이 정무장관으로 있을 때 비서관으로 기용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노 전 대통령이 노신영 전 총리에게 비서관을 추천해달라고 하자 당시 케냐 주 한국대사관에서 일하던 외교관 출신 이병기 비서실장을 발탁했다고 전해진다. 노 전 대통령이 아프리카 순방을 다닐 때 옆을 지키면서 눈에 들었고 노 전 대통령의 의전비서관으로 임명돼 활약했다.

특히 노태우 전 대통령이 박근혜 대통령을 청와대로 초청할 때 이 비서실장이 연결고리 역할을 하면서 유족으로 남은 박근혜 대통령을 챙기라는 조언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이 비서실장은 김영삼 정권 출범을 도우면서 안기부에서 활동했고 2001년 한나라당 정치특보, 2005년 박근혜 대통령 후보 캠프 선대위 부위원장, 박근혜 정부 주일 대사를 거쳐 박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청와대 비서실장까지 오른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이 비서실장의 이 같은 전력을 들어 국정원장 임명 당시 "5. 6공 군사독재정권에 부역했던 관료이자 과거 안기부의 대표적인 정치공작이었던 총풍, 북풍공작의 주역이었다”며 “국정원이 존폐까지 거론되며 총체적인 개혁 요구에 직면한 지금, 완전히 정반대의 인사를 강행했다”고 비판했다.

반대로 이 같은 전력이 정무적 판단을 키우는데 도움을 줬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정치권 인사는 "박 대통령이 국정원장을 청와대로 데려오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그만큼 가까운 사람은 비서실장으로 둬야 한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라며 "인품이 원만하고 욕을 먹지 않을 이병기 국정원장을 낙점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과 박근혜 대통령 ⓒ연합뉴스
 

김철근 교수(동국대)는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군인출신이나 검찰출신을 주요 인사에 앉혀왔는데 국정원장이 비서실장으로 왔다는 것은 이례적"이라며 "국정원장이 얼마나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겠느냐, 집권 3년차 당정청 관계에서 이병기 비서실장이 가지고 있는 많은 정보를 활용할 것이라는 우려도 크다. 정보 정치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가 향후 친위 친박 체제를 앞세워 국정운영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날 이병기 비서실장과 함께 김재원, 주호영, 윤상현 의원을 정무특보단으로 선임한 것을 집권 3년차 박근혜 정부의 구상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3명의 의원은 대표적인 친박 의원으로 분류됐다. 

새누리당 지도부가 비박계로 이뤄진 가운데 친박인 이완구 총리 후보 임명을 시작으로 정무특보단에도 친박 의원들을 배치해 당정청 관계를 주도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김철근 교수는 "이병기 비서실장과 친박 의원들로 구성된 정무특보단 인사는 친박 친위대의 완결판으로 볼 수 있다"며 "야당이 뻔히 반발할 수밖에 없는데 진영 논리에 입각한 대결구도로 정국을 이끌겠다는 의중을 드러낸 것이고 반대로 보면 정권 말기적인 현상의 위기감의 발로일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진영 논리로 가야 손쉽게 자신의 지지층을 회복할 것이라는 알고 한 인사"라고 지적했다.

한편, 이병기 비서실장 임명 과정은 그야말로 우여곡절이었다. 이날 오전부터 언론은 차기 비서설장 인사에 대해 사실상 현명관 한국마사회 회장이 낙점됐다고 보도했다. 새누리당 친박 관계자를 인용해 26일 현 회장이 박 대통령의 연락을 받고 마음을 굳혔다는 말까지 나왔다. 

언론사 사진 기자들은 현 회장 내정 소식을 전해 듣고 한국마사회로 갔지만 오후 1시가 넘어 이병기 국정원장이 내정됐다는 얘기를 듣고 복귀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오후 1시를 넘어 국회 출입 기자들 사이에서 현명관 회장 내정이 사실이 아니고 인사 발표가 나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청와대 출입기자들도 이병기 비서실장 임명 수십분 전 까지도 현명관 한국마사회장 내정이 유력한 것으로 알고 있다가 이병기 후보자로 바뀌면서 당혹스런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일각에서는 현 회장으로 내정했다가 흠결이 발견됐고 여론이 악화될 것을 우려해 이병기 후보자를 임명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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