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이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국면에서 ‘시계 언론플레이’ 공작에 직접 나섰다는 검찰 관계자 주장을 경향신문이 26일 단독 보도했다. 

경향은 전날에도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받은 명품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언론보도 등은 국정원 주도로 이뤄진 것”이라는 이인규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57·법무법인 ‘바른’ 변호사) 발언을 보도했다. 당시 이 전 부장은 노 전 대통령 수사를 진두지휘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회갑선물(시계) 등 금품을 받은 혐의로 2009년 4월30일 대검 중수부에 소환됐다. 언론은 그의 소환 과정을 생중계했고, 검찰 발 속보 받아쓰기에 급급했다. ‘무리한 검찰 수사’와 ‘받아쓰기 언론’은 노 전 대통령 죽음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 2009년 4월 22일자 KBS보도.
 

명품 시계 강조한 KBS·조선일보

연합뉴스는 2009년 3월 31일 <박연차, 미술품 구입도 ‘큰 손’>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박 회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도 고가의 시계를 생일선물로 주는 등 ‘시계 로비’를 벌인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의혹 근거는 “박 회장은 또 수년 동안 수억 원짜리 명품 시계를 구입하는 등 시계에도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4월 22일 언론은 다시 ‘명품시계’를 주목했다. KBS 메인뉴스는 이날 <회갑 선물로 부부가 억대 시계>라는 단독 리포트에서 “지난 2006년 9월,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은 노무현 당시 대통령 측에 고가의 명품 시계 2개를 건넸다”며 “보석이 박혀있어 개당 가격이 1억 원에 달하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스위스 P사의 명품 시계였다”고 밝혔다. 

이러한 보도가 나온 시점은 검찰이 정황만으로 수사한다는 비판이 제기되던 때였다. 노 전 대통령은 박 전 회장으로부터 600만 달러를 수수한 혐의로 수사받고 있었고 검찰은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던 시기였다.

   
▲ 조선일보 2009년 4월 24일자보도.
 
   
▲ 아시아투데이 2009년 4월 24일자보도.
 

다음날 진보·보수 언론을 막론하고 이 소식을 1면에서 전했다. 특히 조선일보는 4월 24일 5면 <국내 매장에 5~6개뿐… 문재인 “망신주자는 거냐”>를 통해 스위스 P사가 ‘피아제’였다고 밝혔다. 아시아투데이도 <135년 역사 스위스 피아제社 제품… 30억원 넘기도>라는 기사에서 “盧 전 대통령 부부가 받은 시가 1억원 시계”라고 설명했다. 본질과 무관한 기사들이었다.

한국일보는 <檢 “억대 시계 정보 흘린 나쁜 빨대 색출”>이라는 기사에서 시계 보도에 대한 검찰 반응을 보도했는데, 당시 홍만표 대검 수사기획관은 “우리 내부에 형편없는 ‘빨대’(취재원을 지칭하는 은어)가 있는 데 대해 굉장히 실망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경향은 지난 25일 “빨대 논란에 대해 검찰의 추적 조사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국정원 작품? ‘논두렁’ 따라쓴 언론

이인규 전 부장에 따르면, “권양숙 여사가 명품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언론보도”는 국정원이 주도한 것이다.

이 전 부장은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검찰이) 노 전 대통령에게 ‘시계는 어떻게 하셨습니까’라고 묻자 노 전 대통령이 ‘시계 문제가 불거진 뒤 (권 여사가) 바깥에 버렸다고 합디다’라고 답한 게 전부”라며 “논두렁 얘기는 나오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런 식으로 (국정원이) 말을 만들어서 언론에 흘린 것”이라고 말했다.

SBS 메인뉴스는 2009년 5월 13일 단독 리포트 <“시계, 논두렁에 버렸다”>에서 “지난달 30일, 검찰에 소환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우병우 중수1과장으로부터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받은 명품 시계를 받아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며 “이 시계는 박 전 회장이 지난 2006년 회갑 선물로 노 전 대통령 부부에게 전달한 것으로 남·녀용 각각 1억 원을 호가하는 고가품”이라고 밝혔다. 

   
▲ SBS 2009년 5월 13일자 보도.
 

SBS는 “이에 대해 노 전 대통령은 권 여사가 자기 몰래 시계를 받아 보관하다가 지난해, 박 전 회장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자 시계 두개를 모두 봉하마을 논두렁에 버렸다고 진술한 것으로 확인됐다”며 “비싼 시계를 논두렁에 버린 이유에 대해서는 집에 가서 물어보겠다며 노 전 대통령이 답변을 피했다고 검찰은 밝혔다”고 전했다. 그러나 논두렁이라는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 명확하지 않다. 

국민일보는 14일자 3면에서 “권 여사는 또 박 전 회장에게 회갑 선물로 받은 1억원대 명품시계 2개를 검찰 수사가 시작된 직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사저 인근 논두렁에 버렸다고 검찰에 알려온 것으로 전해졌다”고 썼다. 세계일보도 사설에서 “선물로 받은 1억원짜리 시계 2개를 논두렁에 버리고, 미국 주택 매매계약서를 찢어 없앴다는 의혹은 또 무엇인가”라고 했다. 

경향신문은 같은 날 4면 <검찰 “盧측 증거인멸 시도”>라는 기사에서 “권 여사도 박 전 회장이 노 전 대통령 회갑 선물 명목으로 제공한 스위스 ‘피아제’ 시계 2개를 버린 것으로 확인됐다”며 “권 여사는 시계를 봉하마을 논두렁에 버린 것으로 알려졌다”고 밝혔다. 

   
▲ 동아일보 2009년 5월 15일자 보도.
 

동아일보는 다음 날 <“盧측 버린 2억시계 주우러 가자”>를 통해 “봉하마을에서 일부 관광객은 취재진에게 ‘노 전 대통령의 사저에서 가까운 논두렁이 어디냐’고 묻는 등 명품 시계에 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 누리꾼은 ‘이 불경기에 1억원이나 하는 시계를 미련없이 논두렁에 버린 게 사실이라면 오리농법 논두렁으로 달려가자’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경향신문은 서거 당일인 5월23일자 22면에 <시계나 찾으러 가자!>는 제목의 김건중 살레시오 수도회 구로 3동 주임신부 칼럼을 실었다. 김 신부는 “다가오는 방학 때는 고생해서 몇 십만 원 벌려는 아르바이트 걱정을 하지 말고 애들에게 봉하마을 논둑길에 버렸다는 시계나 찾으러 가자고 했다”고 말했다. ‘명품 시계’가 불러온 비난 여론이 그때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 경향신문 2009년 5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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