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의 또 다른 정치 공작이 폭로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9년 검찰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나온 ‘논두렁 시계’가 국정원 작품이라는 것이다. 당시 수사를 이끌었던 이인규 전 대검 수사부장이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밝혔다. 경향신문은 국정원이 검찰에 공작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직접 나섰다고 보도했다.

몇 년이 지난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노 전 대통령 일가가 얼마를 받았고, 무슨 혐의였는지 등등 구체적인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시엔 그렇게 떠들썩했지만, 금방 잊혀졌다. 곧바로 ‘서거’ 국면이 이어진 탓도 있다.

하지만 ‘논두렁 시계’는 여전히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당시 언론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 권양숙 여사에게 억대의 명품시계 2개를 줬고, 이를 논두렁에 버렸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야기는 당시 노무현 일가를 비판하던 수많은 언론의 만평 소재였다.

   
 
 

왜 노무현의 혐의는 생각나지 않는데, ‘논두렁 시계’는 기억에 남는 걸까.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개가 사람은 문 것은 뉴스가 아니지만, 사람이 개를 문 것은 뉴스라는 말이 있다. 특이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선물 받은 시계를 버렸다는 것보다 ‘논두렁’에 버렸다는 것이 더 자극적인 뉴스다.

학교 시험기간 때마다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하는 학생들이 많다.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중요하다고 설명한 교과서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선생님이 지나가는 소리로 한 농담은 잘 기억난다. ‘노무현이 돈 얼마를 받았다’보다 ‘논두렁에 시계를 버렸대’가 더 기억에 남는 원리와 유사하다.

또한 ‘논두렁에 버렸다’는 말은 매우 구체적이다. 그래서 더 신뢰가 간다. 사람들은 추상적인 이야기에 살을 붙였을 때 그 이야기를 더 잘 믿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원리를 이용하는 매체가 지라시다. 일반인들은 정보의 제한으로 연예계 뒷이야기나 권력의 속사정 등을 제대로 알 수 없다. 그 때 ‘뒷이야기’들을 매우 그럴듯하게, 구체적으로 써놓은 지라시가 돌면 사람들은 이 정보를 수용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인규 전 부장이 폭로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국정원은 여론과 언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정확하게 파악한 듯하다. ‘선물 받은 시계를 버렸다’는 것은 검찰로부터 얻은 진술, 즉 기본적인 ‘팩트’다. 이 팩트에 ‘논두렁’이라는 구체적이고 자극적인 거짓을 더했다.

이 팩트와 거짓이 혼합된 거짓은 순식간에 퍼졌다. ‘뉴스가 된다’고 판단한 언론들은 이를 받아썼고, 사람들의 머리엔 ‘논두렁’이 남았다. ‘논두렁 시계’ 뿐만이 아니다. 당시 검찰의 수사 내용은 언론에 실시간 중계됐고 이 과정에서 언론은 자극적인 내용을 더 부각시켰다. 몇몇 언론은 ‘논두렁 시계’가 얼마이고 어떤 제품인지까지 상세하게 보도했다. 자극적 거짓정보가 더 자극적인 보도로 이어진 셈이다.

   
▲ 검찰 로고가 새겨진 깃발(왼쪽)과 국정원 전경. 사진=노컷뉴스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전해철 새정치연합 의원은 25일 CBS 시사자키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언론보도에) 적극적인 대응을 했다”며 “(그러나) 검찰에서 아주 구체적인 것처럼 이렇게 이야기를 계속적으로 해오고 그것을 언론에서 확대해서 보도하는 것을 계속 막을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전직 대통령이 이 정도인데, 일반인이 비슷한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 될까. 지라시의 부작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지라시와 인터넷에 돈 헛소문이 연예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경우도, 헛소문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들도 많다.

문제는 국가기관이 지라시 양산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과거 국가정보원의 전신이던 중앙정보부와 안기부는 ‘정치공작’을 위해 사람들을 잡아다 고문해서 입을 틀어막았다. 고문이 어려워진 시대, 국정원은 여론에 직접 개입하고 있다. 방법은 다양해 보인다. 댓글을 다는 방법도 있고, 팩트에 거짓을 더해 헛소문을 퍼트리는 방법도 있다. ‘고문기술자’들이 ‘스토리텔링 기술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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