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일요일, 메시지가 왔다. “이진아가 오디션에 나오는 건 반칙이야. … 아니야. 이진아가 반칙이 아니라 이진아가 진작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사회구조가 정말 이상한 거야.”

건반 치는 이진아의 등장은 저간의 사정들을 압축해 놓은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 아닌가 싶다. 심사위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악에 한 음 한 음을 아껴 쓰는 흑인 바하’의 등장이다. 대중적 반응은 호불호가 엇갈리긴 하지만, 그건 그만큼 이진아의 음악이 듣기 좋으면서도 낯선 것이라는 결정적 증거인 셈이다.

주지하다시피, 다른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주춤하는 사이 는 조금씩 진화를 거쳐 왔다. SM의 보아가 빠진 자리에 안테나의 유희열이 들어온 게 대표적이다. 프로그램 진행이 좋아진 효과도 생겼지만, 무엇보다도 음악적 저변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K팝 하면 흔히들 아이돌 댄스 음악을 떠올리지만, 유희열이라는 존재는 여기에 장르적 다양성을 선사하면서 건강한 불협화음을 내는 것처럼 보인다.

   

▲ SBS 출연중인 가수 이진아

 

 

R&B와 댄스음악 그리고 ‘악마의 편집’이 포화 직전에 이른 시장 상황에 대해 가 보여준 적응력과 흡수력이 아니었다면, 일요일 오후 공중파에서 이진아와 그녀의 음악을 접하기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상이한 장르를 혼합시키고(<시간아 천천히>), 친숙한 멜로디 라인에 균열을 내며(<마음대로>), 상호독립적인 노래와 연주를 조화시키는(<냠냠냠>) 음악이란 완전 다른 세상의 이야기가 아닌가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진아라는 중고신인(?)은 일종의 희소식과도 같다. 이진아는 아이돌로 대동단결해서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린 K팝에 다양화라는 중요한 계기를 가져올 수도 있다. 물론 강고한 아이돌 공화국에서 실현가능성은 여전히 미지수다. 과연 그녀는 대중적 지지를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탑 텐에선 얼마큼 올라갈 수 있을까. 또는, 대중들의 외면 내지는 반감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기 음악을 밀어붙일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서 K팝과 는 점점 진화해가는 걸까.

어쨌든 인디라고 눙쳐지는 세계에도 이지리스닝 팝뿐만 아니라 듣는 귀를 낯설게 하는 음악이 존재해왔다는 건 정말 귀중한 발견이다. 유희열의 말마따나, 들을 음악이 없는 게 아니라 들을 음악을 찾지 않고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기 때문이다(다만 그녀의 1집 앨범에선 다른 세션과 뒤섞인 통에 자기만의 독특함이 퇴색한 건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 일요일 날 메시지의 내용은 이진아에 대한 놀라움과 더불어 현실에 대한 씁쓸함을 표현했던 셈이었다. 오늘날 우리들 대다수는 목청 좋은 가수가 TV에 나와 일상생활을 깨워주길 바라며 멍하니 앉아 있다. 그것도 아니면 멜론 차트 100곡을 무작위로 재생시켜 놓든가.

마음을 울리면 합격이고 그렇지 않으면 불합격. 대국민 투표 따위에 참여하면서 능동적인 문화시민인 척 하지만, 알고 보면 굉장히 서글픈 현실이다. 이진아의 발견과 그녀에 대한 열광은 새로운 대중음악을 갈구하는 이들이 그 어떤 문화적 여유도 없는 채로 지난한 삶을 살고 있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이진아가 오디션에 나오는 건 명백한 반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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