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든 신문이든 잡지든 라디오든 대중매체에서는 보통 필자나 출연자에게 일관된 요구를 한다. 쉽게 쓰고 말하라는 것이다. 그래도 필자나 출연자가 말이 잘 안통하면 더 구체적인 지시를 한다. 독자의 수준은 중학생이라거나, 무직자나 노령연금생활자도 웃을 수 있는 프로를 만들라거나 대상층에 대한 각종 사례를 든다. 결국은 눈높이를 맞추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알찬 콘텐츠를 쉽게 전달할 수만 있다면야 꼭 응해야 할 요구다.

그런데 눈높이를 낮추는 일과 눈높이를 맞추는 일은 다른 일이다. “이런 것은 독자들이 이해하지 못할 거야”, “지금 이 시간대의 시청자들은 이해력이 떨어져” 등등 나름의 논리와 관습에 의해 눈높이를 ‘낮추는’ 일에만 전념을 하게 된다. 어느새 맞춰야할 눈들의 수준이 저 아래쪽에 있다고 정해 버린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자면 미디어의 수요자란 대부분 ‘바보’인 것이다.

대중매체는 그 특성상 대중을 염두에 둔다. 그런데 그 대중의 규모는 제각각이라서 만에서 천만 단위까지 천배이상의 격차가 있다. 그 규모가 커질수록 수준은 점점 낮춰 잡는다. 물론 우리가 소파에 기대 바보가 되는 일도 일상이다. TV는 바보상자라는 오랜 도시 속담이 괜히 생겼을 리 없고, 그 순간만큼은 지친 두뇌를 푹 쉬게 하기에 나도 늘 챙겨보는 프로가 있다. 그런데 내가 바보가 되기로 한 것과 남이 나를 바보로 보는 것은 다른 일이다.

   
애니메이션 '심슨가족'의 한 장면.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독자와 시청자는 바보고 그들을 재미있게 해주는 것이 미디어의 역할이라고 체념하는데 있다. 이것이 체념이면 그나마 다행인데 전략일지도 모른다. 바보들이든 뭐든 많이만 모이면 광고주가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럴 수도 있다. 공영방송의 부담 따위 느끼지 못하는 군소 방송국들은 더 노골적으로 이 노선을 따른다.

당연히 저널리즘이니 공론장이니 어젠다 설정이니 아무 상관없어진다. 대신 학교에 가주고, 대신 친구들과 뛰어 놀아 주고, 대신 결혼도 해 주고 육아도 해 주고, 대신 잡담도 해 주면 그만이다.

여기에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인데, 이를 기사로 다시 실황중계를 한다. 어떤 연예인이 TV에서 무슨 말을 했다더라라는 손쉬운 저널리즘은 이번에는 포털로 넘어 가서 트래픽을 생산해 낸다. 그리고 이를 다시 또 다른 예능 프로가 받아서 재생산해 낸다. 이 순환구조의 내용은 그 수준도 수준이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어차피 연예인이 대중을 즐겁게 하기 위해 무리수를 둔 것으로 정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구조에서는 순환의 노력이라도 있다. 더 손쉬운 법이 있는데 바보들의 관심이나 트래픽을 얻기 위한 직접적인 행동을 감행하는 것이다. 제목에 ‘충격’ 등을 넣어가며 낚시질을 하는 유치한 행동을 보인다. 얕은꾀다. 그런데 이 꾀가 먹혀 회사를 먹여 살리고 있으니 멈출 생각이 없다.

방송국PD도 신문사데스크도 이제 게시판 관리자나 온라인게임의 영자(운영자)가 되어가고 있다. 게시판의 성격에 찬동하지 않거나 온라인게임의 광팬이 아니어도 이 일을 할 수 있듯이, 미디어도 영혼 없이 움직일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막장 게시판과 게임을 관리자가 그렇게 내버려 두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바보를 연료로 쓰는 머리 좋은 이들이다.

이에 지친 대중은 자기 스스로 미디어가 될 수 있다는 소셜 미디어에 희망을 걸기도 했다. 그런데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일은 비싼 일이다. 일상의 자투리에 만들어내는 미디어에는 그 한계가 있다. 겨우 기사를 소개하고 댓글을 다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믿을 수 있는 친구들이 데스크가 되어 미디어를 취사선택해 준다는 맛은 있지만, 그 덕에 정작 알아야 할 정보에 대해서는 눈을 감게 된다. 내게 편한 정보에만 얼마든지 탐닉해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 나서서 바보가 되어 가고 있다. 그나마 효험이 있다면 멀쩡한 줄 알았던 이들이 소셜미디어 덕에 그 민낯을 알게 된다는 정도일까? 어쩌면 소셜미디어는 이 바보탐지기의 기능이 최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탐지된 바보를 배제하면서 나의 재미, 나의 감동, 나의 기쁨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다.

   
▲ 김국현 IT 칼럼니스트·에디토이 대표
 

그 덕에 미디어가 풀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산적한 사회문제로부터는 모두가 눈을 감게 될 수 있었다. 마음 편하고 안락하게. 양질의 미디어를 만드는 일은 귀찮고 힘이 든다. 대신 사회문제는 바보 미디어를 자양분 삼아 마음껏 자라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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