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깊이 사랑한 사람은 모두 봄에 죽었습니다. 봄에 치르는 상을 흔히 호상이라 합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을 때 손님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눈부신 햇살 사이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가다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을 때 옛사람들의 말이 떠오릅니다. 아, 잔인한 봄.

이왕 봄 이야기를 한 김에 비밀을 털어놓겠습니다. 저는 20년째 사춘기를 앓고 있습니다. 20년째 중 2병 환자죠. 그것도 사춘기의 가장 안 좋은 점만 모아서 앓은지 벌써 발병 20년째, 왜 그런 것들. 근거 없는 자신감과 당장 아파트 18층에서 뛰어내리고야 말 것 같은 자기모멸, 누구든 사랑하고 누구에게든 사랑받을 수 있을 것 같은 뽀송한 마음과 두 번 다시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채 반지하 벽지의 곰팡이보다 못한 존재로 혼자 죽어갈 것만 같은 눅눅한 확신이 교차하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제발 여기서 내리고 싶습니다. 내리고 싶은데 안전장치랍시고 몸을 열차에 고정시키고 있는 바가 풀리질 않아 주검이 되기 전엔 내릴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롤러코스터. 재미있지도 않고 스릴도 없고 이젠 제발 내려 줘, 회전목마나 돌아가는 커피잔에서 얌전하게 있을게요 제발, 하고 롯데 신격호 회장한테라도 애원해 보고 싶은 마음.

연애한다고 상황이 좋아지는 게 아니라 같이 탔던 사람들이 토하면서 뛰쳐나가더군요. 늘 그럴 만 하다고 생각했어요. 나도 나랑 상종하기 싫다, 그런데 본인이라서 평생 상종할 수밖에 없는 이 마음을 아시나요? 최근에 몸도 다치고 마음도 좀 다치고 해서 나가기가 싫었습니다. 한양대학교 석좌교수 라종일 선생님과 괴로울 때 토하듯 보낸 편지와 그 답장을 받아 엮어낸 책 <가장 사소한 구원>의 독자행사가 얼마 전에 있었는데, 그날은 죽어도 나가야 했죠. 거울에 비친 얼굴이 너무 미워서 선생님께 카톡을 보냈습니다. ‘오늘 너무 아파서 꼴이 상당히 좋지 않으니 부디 혜량하십시오.’ 곧 이런 답장이 왔습니다. ‘서시빈목을 모르십니까.’

물론 저는 모르므로 찾아봤죠. 서시빈목(西施嚬目). 옛 중국의 미녀 서시가 아파서 얼굴을 찡그리자 더욱 아름다워서 동네의 평범한 아가씨들도 얼굴을 찡그리고 다녔다나요. 이어서 다음 카톡이 왔습니다. ‘미인은 아프면 더욱 아름다운 것을 모르십니까.’ 결국 저는 참지 못하고 푸할할 하고 웃고 말았습니다. 서시라뇨, 당치 않은 것을 모를 리 없지만 그토록 너는 오늘 못생겼다, 살 찐 거 아니냐, 가슴이 너무 작아 흥분이 안 된다, 엉덩이가 처진 것 같다, 요 따위 소리만 듣고 살다가 이 나이에 드디어, 75세의 신사에게 서시빈목입니다, 하는 말을 듣는 날도 오긴 오는군요.

혹시 당신도 누가 얼굴이 크다는 둥, 부었다는 둥, 뭐 그 따위 소리를 하는 날에는 살며시 날려 주시길 바랍니다. 서시빈목이야. 놈들이 그런 걸 알 리 없으니까. 혹시 근처의 여자분이 아프다고 하거든 서시빈목입니다, 라고 해주세요. 그게 뭐냐고 하면 인터넷에서 찾아보라며 스윽 웃어주세요.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해진다고 하던가요. 우리 서로 너무 까지 말고, 아프지도 말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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