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에 위치한 성심여고 교장 김율옥 수녀는 지난 설부터 명절날 남들보다 늦게 귀경길에 올랐다. 이번 설 당일인 19일에도 김율옥 수녀는 마사회 용산지사 앞 천막 농성장에서 진행된 용산 화상경마장 추방을 위한 미사를 드린 뒤 오후가 돼서야 가족들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 이번 설은 지난해 1월 22일부터 용산 화상경마장을 반대하는 주민·학부모 등이 천막농성에 들어간 이후 맞는 세 번째 명절이다. 

이날 미사를 진행한 조현철 신부(서강대 신학대학원 교수)는 “이번 설은 사순절 시기와 겹치는데 두 가지 모두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좋은 날”이라며 “명절과 사순시기를 통해 새해에는 위선을 경계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 신부에 따르면 사순시기는 예수부활 전 40일 동안 위선과 가식을 버리고 가난한 자의 삶과 함께하는 예수의 삶을 돌아보는 기간이다. 

   
▲ 19일 서울 용산 화상경마장 개장 반대 천막농성장 앞에서 화상경마장 추방을 위한 미사가 열리고 있다. (사진 = 장슬기 기자)
 

조 신부는 “속이 비어있는 존재일수록 겉만 번지르르 하게 치장을 하게 되는데 이게 위선”이라며 “화상경마장의 실상이 인간을 황폐화시키는 도박장인데 마사회가 이를 레저산업이나 문화시설로 포장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용산구 용문동 주민 김교영씨는 “마사회가 용산 화상경마장을 ‘장외발매소’라고 부르지 않고 ‘렛츠런CCC’라는 명칭을 사용하며 도박장의 이미지를 탈피하려 한다”고 지적했다. 

김율옥 수녀는 지난해 3월 1일 성심여중고 교장으로 취임했다. 성심여중고는 용산 일대에서 꽤 많은 학부모들이 자녀들을 보내고 싶어 하는 소위 ‘명문’학교로 박근혜 대통령의 모교이기도 하다. 하지만 취임 직후 학교와 200여m 떨어진 곳에 용산 화상경마장이 들어설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같은해 5월 성심여중고 교사들과 학부모, 일대 주민들은 용산화상경마장추방대책위원회(대책위)를 만들고 반대 운동을 시작했다. 

   
▲ 지난해 1월 22일부터 용산 화상경마장을 반대하는 주민·학부모 등이 서울 마사회 용산지사 앞에서 화상경마장 개장을 반대하며 천막농성 중이다. (사진 = 장슬기 기자)
 

주민들에 따르면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에 들어설 화상경마장은 용산참사가 벌어졌던 용산 재개발과 관련이 있었다. 용산 재개발에 천문학적인 금액이 투자되면서 그와 함께 근거리에 있는 화상경마장도 붐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전국 최대 규모로 지어졌다. 용산 재개발이 무산됐지만 마사회 용산 지사는 지상17층·지하8층 규모로 지어졌고, 마사회는 화상경마장 개장을 계속 노리고 있다. 

화상경마장 반대를 위해 마사회 용산지사 앞에서 지난해 1월 22일 천막 농성에 들어간 이후 현재 주민과 성심여중고 학부모 등 40여명이 천막을 번갈아가며 지키고 있다. 이날 미사에 참여한 성심여중 1학년 학생의 아버지인 정연욱씨 역시 설 명절이지만 오후에서야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다. 설당일 오후에는 주민 김교영씨가 천막을 지키기로 했다. 정씨는 “화상경마장이 들어선다는 소식을 듣고 딸이 초등학생일 때부터 반대 모임에 참여했고 이제는 딸이 중학생이 됐다”며 “내 아이 뿐 아니라 친구들의 교육을 위해 참여했다”고 말했다. 

화상경마장이 생기면 그 일대 유흥업소가 생길 수밖에 없고, 1만 명을 수용하는 용산 화상경마장 이용객들이 다 학교 쪽으로 건너와 학생들의 생활권과 겹치면서 공터에서 술을 마시는 등의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것이 대책위의 우려다. 김율옥 수녀는 “1989년 처음 수녀회에 들어오고 나서 용산에 화상경마장이 작게 있는 걸 봤는데 그 때 도박으로 인해 영혼이 피폐해진 사람들이 학교 주변을 돌아다녀 불안했다”며 “이 동네에서 오래 살던 주민들은 그 당시의 학습효과가 있는데 이번 화상경마장은 그때보다 더 큰 규모이고 요즘은 여고생들이 공부하느라 밤에 하교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막아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마사회는 현행법상 화상경마장이 학교와 200m 떨어지면 문제가 없기 때문에 개장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에 김율옥 수녀는 “이미 서울시의회에서 화상경마장을 반대한다고 의견을 모았고, 박원순 서울시장도 찾아와 거대한 마사회 건물을 보고 놀랐다”며 “학생들이 용산역 근처 영화관만 가려고 해도 마사회를 지나가야 하는데 200m가 조금 넘는다고 문제가 없다는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뿐 아니라 용산주민 17만 명이 반대 서명을 했고, 용산지역 국회의원, 용산구의회, 용산구청, 서울시 교육청까지 화상경마장을 폐쇄해야한다는 입장을 밝힌 상태다.

성심여중 학부모 정연욱씨는 설 당일에는 미사 공간으로 이용됐던 천막농성장을 ‘주민들의 사랑방’이라고 소개했다. 정씨는 “올 봄에는 인문학 교실을 열 계획인데 지난해에도 기타교실로 활용하고 가을 운동회를 여는 등 주민들과 함께하는 공간으로 꾸려가고 있다”며 “학교(성심여중고)에 선생님과 교장선생님도 농성장에 찾아오기 때문에 학부모와 학생이 다 같이 이곳에 모여 자연스럽게 교육이야기를 하는 소통의 장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정씨는 “마사회랑 싸우며 외국 사례에 대해서도 공부했는데 홍콩은 경마장이 많은데 그 수익금을 저소득층 병원 등을 운영하면서 다시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씨는 마사회가 주민들에게 적대적이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6월 마사회가 용산 화상경마장을 기습 개장하는 과정에서 주민들과 실랑이가 벌어졌고, 마사회 관계자는 대책위 주민 1명을 상해죄로 고소했다. 

지난 15일 대책위는 농성장에서 미리 명절 차례상을 차렸다. 이날 대책위는 “박근혜 정부는 용산 화상경마장을 빨리 폐쇄하기 바란다”며 “더 이상 명절에 차례 상을 농성장 앞에 차리는 일 없이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또한 대책위는 “학교와 교육 환경이 악화되는 일 없이, 아이들을 도박장 문제와 관련된 걱정을 하지 않고 키울 수 있도록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지난해 1월 22일부터 용산 화상경마장을 반대하는 주민·학부모 등이 서울 마사회 용산지사 앞에서 화상경마장 개장을 반대하며 천막농성 중이다. (사진 = 장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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