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건 “증세 없는 복지”라는 박근혜 정부의 불가능한 프로파간다에서 비롯했다. 연말정산을 소득공제에서 세액공제로 전환하면서 환급액이 줄어들고 일부는 추가로 세금을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사실상의 증세라는 비판이 쏟아졌고 박근혜 정부는 화들짝 놀라 세액공제를 확대하겠다며 물러섰다. 증세를 증세라 부르지 못하는 정부를 겨냥해 조중동과 보수 성향 언론은 복지를 줄여야 한다고 압박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분위기에 밀려 보건복지부는 3년 가까이 추진했던 건강보험 개편안을 전면 백지화했다.

1. 재산이 175억원인데도 건강보험료를 2만원 밖에 안 내는 방법이 있다.

1998년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박탈당하고 백수로 지내던 시절, 이명박 전 대통령이 그랬다. 그 유명한 영포빌딩에 직원 6명을 둔 청소용역 회사를 만들고 이 전 대통령도 대표이사로 등록했다. 2000년에는 월 평균 소득이 99만원, 2001년에는 133만원이라고 신고했고 보험료로 월 1만3000~2만7000원을 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건강보험은 직장가입자와 지역가입자로 나뉘는데 직장가입자로 등록하면 임대소득이나 이자소득 같은 걸 전혀 따지지 않기 때문이다.

2. 송파 세 모녀는 소득이 전혀 없는데도 건강보험료로 5만원을 냈다.

소득이 없어도 건강보험료는 내야 한다. 지난해 3월 생활고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세 모녀처럼 소득 500만원 이하 지역가입자의 경우 성과 연령, 재산과 자동차 보유 여부 등을 기준으로 보험료를 산정하는데 인두세 성격으로 2만5280원, 월세 50만원을 전세로 환산한 3699만원을 재산으로 잡고 이 가상의 소득에 부과되는 보험료가 9830원, 전세에 부과되는 보험료가 1만1950원, 모두 더해 5만140원을 내야 했다. 6개월 이상 체납하면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된다.

3. 재산이 5억원이 넘어도 건강보험료를 전혀 안 내는 방법이 있다.

지난해 11월 은퇴한 김종대 전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이 이런 경우다. 서울 신사동에 아파트가 있고 지방에 논과 대지를 포함 국세청 과세표준 기준으로 재산이 5억6000만원 상당에 퇴직 이후 연금을 연간 4000만원 정도 받게 되는데도 보험료를 전혀 내지 않아도 된다. 김 전 이사장의 부인이 아직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 김 전 이사장이 부인의 피부양자로 등록 되기 때문이다. 4000만원이 넘으면 피부양자 자격이 박탈되고 지역가입자로 등록되기 때문에 김 전 이사장은 올해 소득이 집계되는 내년부터는 지역가입자로 등록된다.

   
자가 주택을 소유하고 있지만 소득은 전혀 없는 노부부의 건강보험 청구서.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제공.
 

4. 연 소득이 1억원이라도 건강보험료를 안 낼 수 있다.

근로소득이 없고 사업소득이 500만원이 넘지 않으면서 금융소득과 연금소득, 기타소득이 각각 4000만원을 넘지 않으면 직장가입자의 피부양자로 둘 수 있고 피부양자가 되면 건강보험료를 안 내도 된다. 이를 테면 직장 생활을 하는 아들의 연봉이 3000만원 밖에 안 되고 은퇴한 아버지가 금융소득이 3900만원, 연금소득이 3900만원, 임대소득이 3900만원, 연 소득이 1억1700만원이나 되는 경우라도 이 아버지는 아들의 건강보험에 기대어 혜택을 받을 수 있다.

5. 연봉 8억원과 연봉 80억원인 사람이 내는 보험료는 같다.

= 월 소득이 7810만원 이상인 사람들이 내는 보험료는 모두 같다. 세계 최대 부자로 꼽히는 빌 게이츠가 한국에 살아도 건강보험료는 월 219만원만 내면 된다. 지역가입자의 보험료 상한이 월 219만원이기 때문이다. 직장가입자의 경우 건강보험료 요율이 5.99%에서 올해부터 6.07%로 올랐는데 역시 보험료 상한이 최대 237만원으로 묶여 있다. 근로소득 이외의 이자소득이나 임대소득 등 종합소득이 연간 7200만원이 넘으면 추가 보험료가 부과되는데 역시 최대 237만원으로 묶여 있다.

6. 재산이 100배 늘어도 보험료는 3배만 늘어난다.

지역가입자의 경우 전세금이 5000만원이면 여기에 보험료가 5만원 붙는다. 그런데 1억원 상당의 집을 보유하고 있으면 8만원, 5억원이면 14만원, 10억원이면 18만원, 30억원이 넘으면 26만원이 된다. 재산이 100억원, 1000억원이라도 26만원에서 더 늘어나지 않는다. 애초에 전세금을 재산으로 잡는 것도 억울하지만 전세금이 뛰고 건강보험료가 덩달아 뛰는 건 더 억울하다. 그렇다고 집을 사면 보험료가 더 뛴다. 그러나 1억원에 8만원과 30억원에 26만원은 체감 효과가 다르다.

7. 소나타가 벤츠보다 더 많은 보험료를 낼 수도 있다.

직장가입자는 소득을 기준으로 부과하면 되지만 지역가입자는 소득 추정이 쉽지 않기 때문에 재산과 승용차까지 본다. 승용차는 배기량과 연식에 따라 등급이 달라지는데 정작 차종은 보지 않는다. 이 때문에 2년 탄 소나타가 6년 탄 벤츠보다 보험료가 더 높게 부과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도 벌어진다. 같은 배기량에 같은 연식이라면 국산차와 수입차에 보험료가 같다는 것도 문제지만 정작 생계형으로 쓰는 트럭 등에 배기량 기준으로 보험료를 부과한다는 것도 상식적이지 않다.

8. 실직하면 보험료를 더 내야 한다.

역시 지역가입자의 비애다. 연봉 4000만원 정도 직장을 다니다 실직을 했는데 집이 3억원짜리라면 보험료를 12만원 가량 내야 한다. 직장 다닐 때는 절반을 회사에서 부담하기 때문에 10만원 정도만 내면 됐는데 오히려 부담이 늘어난 셈이다. 달랑 집 한 채 있는데, 물론 집도 없는 사람보다는 형편이 낫다고 볼 수 있지만 소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직장 생활하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보험료를 내야 한다면 울컥할 수밖에 없다. 지역가입자 보험료 산정 기준을 재산이 아니라 소득 기준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9. 지역가입자는 국가적 호구다.

2000년까지만 해도 지역가입자가 직장가입자보다 많았는데 2010년에는 이 비율이 35 대 65로 역전됐고 2013년에는 70 대 30까지 늘어났다. 직장인이 늘어났다기 보다는 변호사나 의사, 고급 음식점, 그리고 빌딩 소유자들이 직장가입자로 변신했을 가능성이 크다. 김종명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운영위원에 따르면 지역가입자로 남아 있는 이들은 영세 자영업자들과 보험설계사나 화물차 운전사 등과 같은 특수고용직, 노인과 실업자, 주부, 학생 같은 미취업자들, 그리고 직장 가입이 안되는 임시직과 일용직 등이 대부분이다.

10. 이 뿐이 아니다.

2013년 말 기준으로 전체 건강보험 가입자 4946만명 가운데 피부양자가 2007만명, 5명 가운데 2명 꼴로 피부양자다. 5채 이상 주택을 보유한 15만명이 피부양자로 등록돼 건강보험료를 한 푼도 안 냈다는 사실이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통장에 19억원이 있어도 건강보험료를 한 푼도 안 낸 사례도 있었고 공무원 연금을 받는 사람 절반이 건강보험료 0원이라는 사실도 충격적이다. 지역가입자 가운데 6개월 이상 보험료를 체납해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급여제한자가 2012년말 기준으로 171만명에 이른다.

   
지난 1월30일 청와대 앞에서 복지시민단체들이 정부의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편 중단을 규탄하고 재추진할 것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제공.
 
   
지난 1월30일 청와대 앞에서 복지시민단체들이 정부의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편 중단을 규탄하고 재추진할 것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제공.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건강보험 체계가 이렇게 문제투성이인데도 박근혜 정부는 건강보험 개혁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정부가 발표할 예정이었던 건강보험 개편안은 건강보험료를 소득 중심으로 개편해 종합소득 부과 기준을 높여 고소득 직장가입자의 보험료를 올리고 소득이 있는 피부양자를 지역가입자로 전환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지난달 29일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 3년 동안 검토해 왔던 이 개편안을 올해 도입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선거 등 일정을 감안하면 박근혜 정부 임기 내에는 하지 않겠다는 의미고 결국 사실상 백지화한 셈이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에 따르면 이번에 복지부가 마련한 개편안이 도입되면 지역가입자 전체 가구 759세대 가운데 최소 531만 가구, 인구 수로는 1000만명 가량의 보험료가 줄어드는 대신 종합소득 부과 기준을 7200만원에서 2000만원으로 낮추고 피부양자도 종합소득이 2000만원이 넘으면 지역가입자로 전환된다. 약 1.3%, 46만명 정도 보험료가 올라가게 된다. 고소득 계층에서 46만명의 보험료가 늘고 저소득 계층에서 1000만명이 줄어드는 개혁을 원점에서 되돌렸다는 이야기다.

오 위원장은 “지역가입자의 역진성을 해소하기 위해 하후상박으로 보험료 부과방식을 개편해야 한다”면서 “저가 재산의 보험료는 깎아주고 고액 재산의 보험료는 올리고 소득 부과 보험료도 비례성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내가만드는복지국가는 1일 성명을 내고 "직장가입자와 피부양자 중 전체 인구 1%에 불과한 45만명의 추가 납부자, 지역가입자 중 고액재산가 이들의 특혜를 계속 보호하겠다는 것"이라면서 "복지부 장관의 단독 결정이 아니라면 청와대가 나서서 결자해지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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