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의 한 여성이 자신의 애완견에게 110만 달러(약 12억원) 정도의 유산을 남겼다. 그 여성에게 반려견이 딸과 같기 때문에 부유한 생활을 유지해주려 했다. 비슷한 시점에 한국에서는 36년 동안 남한강물 사용료를 한번도 내지 않은 오비맥주에 대해 2년치 물사용료 2억원이 부과되기도 했다. 사실 12억이라는 돈은 연예인들에게도 쉽지 회자되었다.

2011년 11월, 한양대학교는 ‘장근석 장학기금’을 만든다고 밝혔다. 배우 장근석이 학교에 12억원을 기부했기 때문이다. 최근 배우 탕웨이가 분당의 땅을 12억에 매각했다는 사실이 보도되어 화제가 되었다. 또한 한류스타들의 광고 개런티가토픽이 되기도 했다. 드라마 ‘대장금’으로 한류스타에 오른 배우 이영애의 편당 광고 개런티는 12억 원으로 알려졌다. 김희선이나 서태지도 한창 때는 이정도의 금액을 받았다. 한류 전지현과 김수현, 이민호, 소녀시대, 배용준, 그리고 고소영, 원빈, 고현정 등이 편당 10억 원의 안팎이다. 이렇게 스타들에게 12억은 정말 쉽게 언급할수 있는 액수로 보인다. 해외에서는 12억은 부자증세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 프랑스의 '부자 증세' 기준은 연소득 100만유로(12억5000만원) 이상이었고, 2102년, 프랑스 정부는 100만 유로를 초과하는 소득의 75%를 징수하기 시작했다. 

어제 12억원에 관련된 국내의 한 법원 판결은 웃음섞인 눈물을 솟아내게 만들었다. 여기에서 12억원이 400여명이 몇 년 동안 밀린 드라마 출연 노동 임금이기 때문이다. 즉 KBS ‘공주가 돌아왔다’(2009), ‘국가가 부른다(2010)’, ‘도망자-플랜비(B)’, ‘정글피쉬’(2010), ‘프레지던트’(2011) 등에 출연했던 단역연기자들은 몇 년동안 임금을 받지 못했던 것. 그것이 모두 12억원에 이른다. 내역을 보면 '공주가 돌아왔다'와 '국가가 부른다'가 모두 약 2억5천만원이고, '도망자'가 약 4억5천만원, '프레지던트'(2011)가 약 5억5천만원, '정글피쉬2'가 3천400만원이다. '감격시대'(2014)의 약 1억3천만원은 이번에 제외되었다. 당시 ‘도망자-플랜비(B)’에 출연했던 가수 비의 출연료는 7억 2천여만원이었다. 드라마 ‘아이리스’에 출연했던 이병헌의 출연료는 20억원에 육박했다. 이런 출연료에 비하면 12억의 금액은 별것 아닐 수 있었다. 그러나 단역배우들에게 이는 매우 금쪽같은 돈일 수밖에 없었다. 생존에 관한 돈이기 때문이다.

   
▲ 한국방송연기자노조가 2012년 12월 서울 여의도 광장 등에서 촬영 거부 선언 출정식을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무엇보다 수백명의 단역 연기자들의 밀린 임금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중앙노동위원회와 1심 재판부의 판결와는 달리 이번에 서울 고법은 방송 단역연기자도 노동자라고 판단했다. 그동안 중앙노동위원회는  KBS와 연기자는 종속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사업자 관계이기 때문에 노동자라고 보기 힘들다는 판단을 해왔다. 1심 법원도 연기자들이 자유계약에 따라 활동하고 근로소득세를 내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KBS의 태도였다. KBS는 자체 제작 드라마의 경우에는 미지급된 출연료가 없다고 주장해왔다. 다만, 외주 제작을 통해 제작한 드라마의 경우에는 책임이 없다고 말해왔다. 일단 외주제작사에 비용을 모두 지급 완료한 상태이고, 출연계약은 외주제작사와 체결한 것이기 때문에  KBS가 밀린 출연료를 지급할 의무가 없다고 밝혀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 고법은 연출감독이 구체적으로 개별적으로 지휘 감독을 연기자에게 행사하기 때문에 노동자로 인정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외주제작사를 넘어 본사도 노동자의 임금 지급에 대한 책임이 있으므로 외주 제작사가 지급을 못할 경우 책임을 져야 하는 셈이다. 일단 촬영장에서는 자신의 자유의사가 박탈되고, 철저하게 명령과 지시를 따라야 한다. 또한 그들은 문화예술행위 자체가 아니라 생계를 위해 지시와 명령을 수행해야한다. 당연히 그러한 명령과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촬영장에서 배제된다. 따라서 이는 단역 연기자의 노동자성을 그대로 드러내준다는 법원의 판단은 타당하다.  

이번 서울 고법의 판결은 대법원 판결에서도 유지될 이유와 필요가 충분하다. 그동안 방송국들은 외주제작사에게 밀린 임금체불 문제에 관해서 책임을 떠넘겨왔다. 외주제작사에게 제작비 벌충을 담당하게 하고, 시청률 부진 등으로 제작비를 제대로 건지지 못할 경우에 그 책임을 모두 외주제작사에게만 전가했기 때문이다. 외주제작사는 재정난을 이유로 출연료 지급을 회피했다. 결국에는 외주제작에게 제작비를 전가한 측면이 큰 방송사들도 책임을 져야 하는 노무 문제였다. 하지만 단역 배우들이 개인사업자들이라는 사법적, 행정적 판단 때문에 방송사가 임금문제에 대해서 책임질 근거가 부족했다.

그러나 이번 고법의 판결은 단역 연기자들도 노동자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에 이를 외주제작을 통해 드라마 제작을 총괄 지시 감독한 KBS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비단 KBS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은 관례 때문에 고통을 받아온 단역 노동자들의 눈물을 닦아줄 때이다. 다만 앞으로 노무 관리가 더욱 교묘하게 이뤄지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한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대법원의 판결과 관계없이 단역 연기자들의 임금지급에 관해 끝까지 방송사들의 책임지는 모습을 기대한다. 단역 연기자들의 임금체불은 노동의 사각지대에 몰린 가장 빈곤한 계층을 상대로 저지르는 최악의 부당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드라마 한류를 운운하는 것은 모순적이고 위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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