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지난 2001년 9·11 테러가 벌어졌을 때 프랑스의 르몽드 1면 머리기사 제목은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다”였다. 13년 뒤 프랑스에서 프랑스판 9·11 테러에 비견할 샤를리엡도 사건이 벌어졌을 때 미국에서 “우리는 모두 프랑스인이다”라고 외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9·11 테러는 미국에 대한 공격이었고 샤를리엡도 테러는 프랑스가 아니라 프랑스의 한 주간지에 대한 공격이었다는 차이가 있다. 과연 그 뿐일까.
프랑스에서는 “나는 샤를리다”라고 외치는 수백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이에 맞서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라거나 이날 살해당한 무슬림 경찰관의 이름을 빌려 “나는 아흐메드다”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샤를리엡도를 둘러싼 논란은 단순히 표현의 자유의 문제를 넘어선다. 르몽드에 따르면 프랑스에 사는 무슬림들은 “나는 샤를리다”라는 구호를 불편하거나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표현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누군가의 신앙을 모욕하거나 경멸할 권리까지 보장하는 건 아니다. 적어도 조롱당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가뜩이나 무슬림은 프랑스 사회에서도 소수자다. 폭력을 반대하고 테러에 맞서는 건 상식이고 어떤 이유로든 살인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이 상황에서 “나는 샤를리엡도를 지지한다”고 표명하는 건 누군가에게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
샤를리엡도는 권위와 위선을 비판한다고 주장하겠지만 모욕을 느낀 상대방에게 표현의 자유니까 수용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놈 촘스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 교수는 “샤를리엡도 테러에 대한 서방의 분노는 위선”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알렉스 캘리니코스 영국 런던대 교수는 “샤를리엡도 테러를 야만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히 지배계급이 무슬림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면서 제시하는 프레임”이라고 지적했다.
이를 테면 1999년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군대가 옛 유고연방 베오그라드에서 세르비아국영방송(RTS) 본부 건물을 폭격해 16명의 기자들이 숨졌을 때 “나는 RTS다”라는 구호는 없었다. 2004년 미군이 이라크 저항세력 거점인 팔루자를 공격했을 때도 수많은 비무장 민간인이 죽었지만 팻말을 들고 거리로 나온 사람들은 없었다. 지난해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공습했을 때도 사망자가 500여명, 기자들 피해도 컸지만 역시 세계는 침묵했다.
▲ 세계의 진실을 가리는 50가지 고졍관념 / 파스칼 보나파스 지음 / 서해문집 펴냄 | ||
샤를리엡도 테러와 표현의 자유를 결부시키는 논의는 매우 복잡다단하다. “나는 샤를리다”라는 구호에는 샤를리엡도의 표현에 동조한다는 의미보다는 모욕이나 조롱까지도 표현의 자유로 존중돼야 한다는 원칙이 깔려있겠지만 “나는 샤를리다” 또는 “나는 아흐메드다”라고 외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차별을 당한 경험이 없다. “나는 테러에 반대하지만 샤를리엡도에도 반대한다”고 적당히 거리를 두는 건 오히려 정치적으로 간편한 스탠드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출간된 ‘세계의 진실을 가리는 50가지 고정관념’은 국제 뉴스를 보는 통념과 편견,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라고 조언한다. 프랑스 국제관계전략연구소(IRIS) 소장인 파스칼 보니파스는 이 책에서 사실 국제 사회라는 건 존재하지 않으며 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공동의 이익을 중재할 수 있는 국제적 통치는 일어난 적도, 일어날 가능성도 없다고 지적한다. 그저 개별 국가들의 이익과 강대국들의 선거일정에 맞춘 선택을 할 뿐이라는 이야기다.
보니파스에 따르면 미국이 세계적으로 군사 비용의 40%를 쓰고 있지만 미국의 일극 체제는 무너지고 있다. 그렇다고 세계가 다극화되는 것도 아니고 중국이 세계를 지배할 가능성도 없다. 보니파스는 “미국의 일극 체제는 불가능하지만 미국의 우월적 위치 때문에 세계가 다극화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미국 없이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고 미국 홀로는 어떠한 국제적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오래된 편견 가운데 하나는 이스라엘과 아랍이 결코 평화롭게 지내기 어렵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인 3분의 2 이상이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고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유대인과 아랍인, 또는 무슬림과 기독교인의 차이는 종교가 아니다. 보나파스는 “‘영토와 맞바꾸는 평화’라는 공식은 평화가 영토와 정치적 타협을 기반으로 가능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테러리즘을 이해하거나 용서할 필요가 없다는 극단적인 입장은 군사적인 부분적인 해결에 의존하게 만든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이라크 자유’ 작전은 사담 후세인 체제를 전복하는 게 목표였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이라크에서 테러 공격이 더 늘어났고 국제 테러리스트 그룹들이 이라크에 모여들었다. 미국 정보기관들은 이라크 분쟁이 미국에 대한 깊은 원한을 키웠다는 것을 결국 인정했다.
테러리즘의 원인은 종교가 아니라는 지적도 편견을 깨뜨린다. “종교를 발본색원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테러리즘을 종교적인 차원으로 한정할 경우 테러리즘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한 종교는 테러리즘의 운명을 타고났고 다른 종교는 그렇지 않다는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테러리즘을 비난한다. 테러리즘의 원인은 종교가 아니라 정치적 지정학적인 상황의 변화다.”
이런 맥락에서 “민주주의는 수출될 수 있다”거나 “9·11 테러가 세상을 바꾸었다”거나 “민주주의 국가들은 전쟁을 하지 않는다”, “아랍 혁명은 도미노 효과를 불러왔다”, “이라크 전쟁은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는 등의 고정관념은 모두 미국적 사고와 매스 미디어가 만들어낸 편견이다. 이 책에서 “국제 뉴스를 의심해야 비로소 세계가 보인다”고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추천사에서 홍세화 협동조합 가장자리 이사장은 “세상에 진실인양 유포되고 있는 고정관념과 통념의 포로가 되지 않기는 무척 어렵다”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빠져있는 확신의 함정에 빠져있을 때는 함정에 빠져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홍 이사장은 “한국은 특히 분단 상황에서 나와 타자의 관계를 선과 악, 흑과 백, 모 아니면 도의 이분법식의 사고 틀에 갇혀서 국제 문제와 관련된 정보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