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죽었다. 다급하게 속보를 전하는 TV뉴스 앵커 목소리에 ‘전쟁이라도 나는 건가?’했지만 걱정은 잠시였다. 진짜 전쟁을 걱정한 건 그로부터 몇 년 뒤의 일이다. 나와 친구들은 노스트라다무스를 믿었다. ‘지구 멸망의 해’라는 1999년, 갓 돌을 넘긴 막내동생을 데리고 어떻게 피난 갈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김일성의 죽음보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더 두려울 정도로, 우리에게 북한은 더 이상 의식할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그 시절 한국 사회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1980년대 후반에 태어난 우리들은 민주화의 열매와 경제성장이 가져온 풍요를 먹고 자랐다. 외환위기의 불안을 온몸으로 느끼며 사춘기를 보냈고, 입시·취업 전쟁을 뚫고 나왔어도 여전히 학자금 대출과 부동산 가격, 결혼, 육아, 부모의 노후문제로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지만, 단 한 번도 우리는 의심한 적이 없다. 민주주의는 일당일가(一黨一家) 독재보다 우월하다. 북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진 않지만, 그들을 부러워하거나 두려워한 적도 없다. 아무리 저쪽에서 위대한 백두혈통을 칭송해도 눈 하나 꿈쩍 않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건 오래된 현실이다. 

그 자신감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의 자택 압수수색부터 통합진보당 정당해산심판과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를 지켜보며 이 상황 자체를 좀처럼 납득하지 못한 까닭이 여기 있다. 513일 동안 54편의 관련 기사를 쓰는 내내 이 전 의원이나 진보당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주·민주·통일이라는 가치에 공감하고,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들이 두 발을 딛고 있는 토대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고백컨대, 나는 그들을 이상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상하다’는 ‘위험하다’와 다르다. 둘은 ‘처벌해야 한다’와는 더욱 차이난다. 당연한 말 같지만 이 단어들의 경계가 모호했던 시절이 존재했다. 그 뼈아픈 경험 덕분에 헌법과 법률이 처벌의 전제 조건으로 엄격한 유죄 입증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내란음모사건과 정당해산심판에서 헌법과 법률을 다루는 두 최고기관이 내세운 논리는 어딘가 허술했다. 이 전 의원 등의 내란관련 혐의 유죄를 인정한 대법원, 진보당 해산을 결정한 헌법재판소 다수의견 모두 ‘엄격한’이란 형용사와 어울리지 않았다. ‘이상하다’, ‘위험하다’, ‘처벌해야 한다’의 경계는 다시 흐릿해졌다. 

유일하게 정당해산에 반대한 김이수 헌법재판관과 내란선동죄는 물론 내란음모죄까지 무죄라고 판단한 이인복·이상훈·김신 대법관 역시 소수의견에서 이 대목을 지적했다. 이들은 정부와 검찰이 ‘이게 정말 위험한가’라는 자신들의 의심을 없애지 못했다고 했다. 다만 2013년 5월 합정동모임에서 오고간 이야기들은 ‘이상하다’고 했다. 그러나 처벌해야 할 정도로, 우리 체제를 무너뜨릴 만큼 위험하지는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 박소희 오마이뉴스 기자
 

이들은 또 민주주의는 우월하다고 말했다. 세 대법관은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확고히 하는 것이야말로 대한민국 체제의 우월성을 증명하고 수호하는 합당한 길”이라고, 김이수 재판관은 “민주주의야말로 바다와 같아서 다양한 생각들을 포용해 가는 것을 그 제도의 본질로 한다”고 했다. 누군가의 ‘이상한’ 생각일망정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토론대상이 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며, 우리가 지켜야 할 체제란 뜻이다.

최근에 만난 한 공안검사는 “아이러니하게도 보수 쪽 사람들이 진보 보다 불안해한다”고 말했다.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신봉하는 보수가 아니라 체제를 비판하는 진보가 우리 체제에 더 자신있어한다는 얘기였다. 당연하지 않은가. 우리는 그럴만한 체제에 살고 있다. 더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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