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서 고양이 세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장은 망원시장에서 자주 보고, 여름에는 집 근처 한강시민공원에서 밤바람 맞으며 산책하기를 좋아한다. 나이는 올해 33살이고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동성애자, 게이(gay)다. 

나는 12살 즈음부터 교회에 다녔다.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는데 아버지는 자동차 유리를 만드는 공장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자영업을 하셔서 일요일에도 늘 바쁘셨다. 놀 장소가 필요했던 난 교회를 매주 들락날락 거렸고 그러다 18살쯤 같은 반 친구를 사랑하게 되면서 내가 동성애자일까 라는 고민을 하게 됐다. 

하지만 그런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교회 안은 물론 주변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는 커밍아웃이라는 말이 무엇인지도,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잘 알지 못 했다. 게이보다 호모라는 단어를 더 많이 쓰던 때다. 

그러다 교회 친구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그 이야기는 전도사님에게까지 순식간에 흘러 들어갔다. 그것이 부담스러워 교회를 잘 나가지 않게 된 스무 살의 어느 토요일 오후, 전도사님이 나를 조용히 교회로 불렀다. “형태야 네가 동성애자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냐?” 라고 물어보았고 나는 “네.” 라고 짧게 대답 했다. 

   
▲ 길찾는교회라는 교회 공동체에 함께 하면서, 2014년 5월 커밍아웃을 하고 세례를 받았다. 사진=형태 제공
 

전도사님은 나에게 많은 이야기들을 해주셨는데 이 말은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한다. “네가 교회를 나오지 않아도 좋고, 성경공부를 하지 않아도 좋지만 그래도 이것만은 기억했으면 좋겠다. 네가 동성애자든 하다못해 살인자라고 하여도, 하나님은 형태 너를 사랑하셔. 형태야 이걸 잊으면 안돼. 알겠지?”    

시간이 흘러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장에서 동성애를 혐오하는 기독교인들을 자주 마주하게 됐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전도사님이 내게 해주었던 말을 다시금 곱씹게 된다. 나는 스무 살 이후에 교회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길에서 오다가다 성공회 민김종훈(자캐오) 신부님을 만나 길찾는교회라는 교회 공동체에 함께 하면서, 2014년 5월 커밍아웃을 하고 세례를 받았다. 대한성공회 안에서 성소수자 신자로는 처음이었다. 

커밍아웃을 하고 세례를 받는 것을 결심한 건 한 청소년 성소수자 때문이다. 그는 기독교인이었는데 어느 날 신경정신과 진료를 받던 중 “동성애는 질병이 아니며 치유법 같은 건 없다”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서 “이제는 보수기독교인들의 동성애 혐오에 당당하게 맞설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2013년 12월 일찍 생을 마감해버렸다. 그의 나이 20살. 내가 전도사님에게 커밍아웃을 했던 때와 같은 나이였다. 

나는 그와 같은 또래의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다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한국 교회 안에서도 성소수자가 커밍아웃을 하고 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세례를 받고 난 이후에 성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는 전도사님들을 알게 됐다. 그들은 청소년 성소수자 신자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어떻게 함께 신앙생활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종종 나에게도 조언을 구해온다. 내가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물어오는 분들에게는 최대한 답변을 하려고 노력한다.  

   
▲ 형태 동성애자인권연대 활동가
 

청소년 성소수자 신자를 괴롭히는 목사님을 막지는 못 했지만 목사님이 될 전도사님과 청소년 성소수자 신자들에 대한 질문과 답을 찾다보면 적어도 성소수자를 괴롭히는 목사님처럼 살지는 않게 되리라는 생각에서다. 떠나간 청소년 성소수자를 살릴 수는 없겠지만 그들을 더 자주 만나다 보면 그들과 내가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삶의 모든 물음은 어쩌면 하나같이 대책이 없다. 하지만 노력하다보면 조금은 달라질 것이라 믿는다. 지금 당신은 성소수자와 함께 살아가는가. 그렇다면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나는 당신과 함께 삶을 살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당신과 함께 살려면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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