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반도체 기흥공장 클린룸은 ‘금기의 라인’이었다. 지난 8년간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은 오로지 노동자들의 증언에 의존해야 했다. <또하나의 약속> <탐욕의 제국> 영화에서도 보안을 이유로 공장 안 풍경이나 라인안의 모습은 찍을 수 없었다. 심지어 역학조사에서 피해자 대리인 동행 요청도 거부당했다. 그 금기의 라인을 지난 22일 처음으로 방문할 수 있었다. 

지난 16일 2차 조정위원회에서 삼성은 조정위원들에게 기흥공장 현장방문 및 라인방문을 제안했다. 사실 참 마뜩찮은 기분이 들었다. 과거보다 훨씬 나아진 환경을 보여줄 게 뻔해 보였다. 게다가 클린룸은 눈으로 볼 때는 깨끗해 보이는 함정이 있다. 반도체 생산에 최대의 적인 먼지를 제거한 곳이 클린룸이다. 예민해진 것은 반올림 협상단 뿐 만이 아니었다. 피해자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마 가장 자동화된 라인을 보여줄 거예요. 6, 7, 8, 9라인도 예전환경이 아니고 다 바뀌었는데, 그보다 더 자동화된 S1라인을 보여줄 거 같네요. 거긴 무인라인이거든요. 저도 따라 들어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기흥공장 오퍼레이터 이소정 님, 다발성경화증 피해자)
“라인 지하에 가스박스 펍프 스테이션 챔버 오픈하여 점검하면 좋겠네요, PM(정비)하는 모습도 보고요.” (기흥공장 3라인 설비엔지니어 출신 이○○님, 뇌출혈 등 산재피해노동자)
“삼성에 당장 쫓아가 다 쏟아 붓고 싶네요. 삼성이 조정위원들에게 자기네들 환경 좋은 쪽으로 참고하란 뜻이겠지요? 맞지요?” (기흥공장 7라인 오퍼레이터 김도은 님 남편 강○○ 님) 

   
▲ 영화 <또 하나의 약속> 캡쳐화면
 

현장방문 당일, 3라인을 비롯하여 1-5라인은 폐쇄되거나 다른 제품 생산라인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3라인은 산재를 인정받은 고 황유미·이숙영이 일했던 곳이다. 삼성은 대신 오늘 볼 라인은 S1라인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은 S1라인은 2005년 2월에 세워졌고, 전체 라인 중에서 평균적인 라인이라고 했다. 

안내하는 삼성 직원들은 입구에서부터 MSDS(물질안전보건자료) 파일을 꺼내보였다. 또한 터치스크린에 물질 명을 입력하면 안내가 자세히 나온다고 보여줬다. 삼성은 입구에 적힌 산안법 조항도 강조했다. 그러나 일 하는 노동자들이 작은 글씨가 빼곡히 적힌 MSDS를 꺼내 읽어볼지 의문이었다. 형식적인 나열이 아니라 노동자가 실제로 알고 활용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정보제공이다. 

우리가 입은 방진복은 반올림 선전전에서 입었던 줄무늬 방진복과 같았다. 현장에서 오래 일했다는 ‘미스 클린’(청정규칙을 관리하는 여성노동자를 일컫는 호칭)은 우리가 방진복을 입고 벗는 것을 도왔다. 안내에 따라 티슈로 화장을 지웠고, 방진마스크와 비닐장갑, 방진모자, 방진 신발까지 갖췄다. 방진복에는 VIP 라고 크게 쓰여 있었다. 그렇다고 이건희 회장이 입은 우주복 같은 방진복은 아니었다. 

자동문이 열리자 기계설비로 가득한 노란빛 라인이 눈앞에 펼쳐졌다. 머리 위로는 풉 박스(웨이퍼 25매가 담긴 박스)가 천정의 레일 위로 휙휙 지나다녔다. ‘아 저게 자동반송 설비구나...’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자동반송 시스템이 오퍼레이터 대신 모든 공정을 다 이어주고 있었다. 이 설비를 셋업하고 유지보수 업무를 했던 김기철씨가 떠올랐다. 그는 7년을 일하고 백혈병에 걸렸다. 하지만 협력업체 소속이라서 삼성이 제시한 보상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20여 미터 간격으로 설치된 경고등에선 빨간색·초록색 불빛이 깜빡였다. 노동자들이 멀찍이 서서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하얀색 방진복은 삼성 정규직, 하늘색 방진복은 협력업체 노동자라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같은 클린룸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들 외에 노동자는 볼 수 없었다. 몇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지 묻자 삼성은 자세한 설명을 꺼렸다. 협력업체 숫자는 아예 말을 하지 않았다. 

   
▲ 영화 <또 하나의 약속> 캡쳐화면. 반올림 권영은 활동가는 "모니터를 보는 노동자 모습은 실제와 같았다"고 설명했다.
 

높은 톤의 쇳소리가 섞인, 웅 하는 기계소리가 견학 내내 들렸다. 마스크를 쓴 코 옆 공간으로 클린룸 공기가 들어왔지만 딱히 어떤 냄새가 난다고 표현하기는 어렵다. 비닐 장갑을 낀 손은 30분도 되지 않아 땀이 찼다. 습진 있는 이들을 위해 비닐 장갑 안에 따로 장갑을 끼게끔 해놓았다. 실내 온다는 20도가 얼추 넘어보였고, 방진복을 입으니 다소 답답하게 느껴졌다. 축구장 몇 배 넓이라는 공장에는 창이 하나도 없었다. 

방사선이 노출될 수 있는 임플란트 공정 앞에 이르자, 한 엔지니어가 방사선 측정기로 방사선 수치를 직접 보여주었다. 수치는 0.05-0.11까지 왔다 갔다 했다. 회사 측 협상 단장 백수현 전무는 이 수치는 1년 동안 노출되어도 X-Ray 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는 수준이라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 자리는 반도체 공정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자리이지 논란을 증폭시키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방사선 측정기에 나타나는 0.05-0.11의 수치는 위험 수준을 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노동자들에게 안전한 수준이라고 할 수 없다. 누군가는 미량의 노출에도 암에 걸린다. 황유미씨의 산재인정 판결문에도 ‘임플란트 공정을 지나다니면서 노출된 방사선 수치가 일반인 선량한도보다 높았다’는 이유가 있다.

이날 반올림 등은 긴 복도를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공정이 하나씩 있어 각 조마다 네 개의 공정을 보았다. 피해자들 증언대로 BAY(베이-각 공정의 세부 작업구역)는 막혀 있지 않아 공기혼합이 당연해 보였다. 그러나 비전문가의 눈으로는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위험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뇌출혈로 퇴직한 구형라인 설비엔지니어 조언처럼 최소한 설비를 PM(예방정비)하는 모습이라도 보았어야 했다. 상시적으로 이루어지는 PM 작업을, 준비 중인 경우 하나 보지 못한 것은 이상했다. 이를 아쉬워하자 삼성은 ‘운’이 없었다고 답했다. 

   
▲ 권영은 반올림 활동가가 지난 22일 기흥공장 방문 후 그린 그림. 사진=반올림 제공
 

삼성이 S1라인을 보여준 것은 안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테다. 하지만 S1라인처럼 자동화가 되었다 하더라도 안전하지 않다. 머리 위로 빠르게 지나다니는 자동 반송기 설치 및 수리기사로 6년 이상 일했던 삼성반도체 화성공장 15라인 협력업체 노동자 김기철님은 2012년 백혈병을 진단받았다. S1라인에서 셋업 및 PM(유지보수)업무를 감독했던 협력업체 기가테크의 현장소장 고 손경주님은 2012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S1라인 엔지니어와 오퍼레이터로 함께 일하다 결혼해 자녀를 낳았는데 아이가 중증재생불량성빈혈에 걸린 경우도 있다. 

그러나 최근 삼성이 조정위에 제출한 보상 제안서에는 이런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배제되어 있었다. 삼성반도체 불산 누출 사고, LG디스플레이 질식사고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위험은 점점 협력업체로 이전되고 있지만 책임을 져야 할 원청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를 외면한다. 이번 라인 방문을 통해 협력업체 노동자를 배제해서는 안 된 다는 것을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덧붙여 우리는 삭막하고 거대한 기계 사이에서 하루 8시간 내지 12시간씩 불편한 방진복을 입고 종일 서서 일한다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를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다. 화학물질이 아니더라도 건강을 염려할 이유는 충분했다. 또 눈으로만 보아서는 알 수 없는 위험에 대비하여 직업병 예방을 위해서는 더 세심하고 치밀한 대책이 필요할 것 같았다. 

특히 단지 회사라는 일방의 주체만이 아니라 노동자, 지역주민, 외부전문가, 시민사회 등 여러 주체들이 함께 안전보건 대책을 마련해 나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게 느껴졌다. 회사의 시선으로는 도저히 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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