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무한도전> '토토가'에 관한 저작권 논란이 이슈이었는데, 그 가운데 문제가 되었던 유사 상표 등록자는 정작 토토가에 출연했던 댄싱팀원이었다. 이에 대해서 MBC에 대한 세간의 시선이 별로 좋지 않았다. 이유는 무조건 법리만 따졌다는 것.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 볼 단어는 댄싱이다. 댄싱은 텔레비전의 속성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단어이다. 한동안 음악의 전달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텔레비전 방송이 자기 부정했던 단어이기도 하다. 이런 자기 부정이 오히려 시청자의 요구를 배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 것이 댄싱이다.

<무한도전> '토토가'는 그동안 텔레비전이 자기 부정한 것을 적극 인정하고 수용했기 때문에 폭발적인 대중적 선호를 받았다. 자기부정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텔레비전의 본질적인 속성이다. 텔레비전의 등장은 시각적인 즉, 비주얼 효과의 극대화였다. 라디오나 음반에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시각적 효과는 텔레비전의 본질적인 속성이면서 가장 강력한 대중적 파급력을 갖게 했다. 이런 점은 아날로그 초창기나 디지털 모바일 시대에도 여전하다.

이 때문에 항상 비판의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시각 효과를 강조하다보니 정작 청각, 소리-사운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심했다. 당연하 청각 효과는 가창력이나 음악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텔레비전은 버라이어티쇼에 더 잘 부합하는 매체였고, 이 때문에 가창력 있는 가수들과 음악성 있는 노래들도 항상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90년대부터 항상 댄스곡들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도 아이돌 가수들의 노래들은 이러한 계보를 잇고 있다.

   
'K팝스타'의 한 장면. ⓒSBS.
 

이 때문에 아이돌 가수들의 노래 즉 댄싱곡들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각 방송사의 '슈퍼스타 K', '케이 팝 스타', '히든 싱어', '나는 가수다', '불후의 명곡' 과 같은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가창력 있고, 음악성이 있는 노래들은 비댄스곡들이었다. 거의 전부라고해도 될만큼 댄스가수와 그들의 곡들을 외면 되었다. <무한도전> '토토가'는 이런 흐름에 반대로 질러갔다. 텔레비전은 기본적으로 버라이어티쇼에 부합하는 매체임을 새삼 도드라지게 했다. 댄싱가수와 그들의 곡들을 적극 부활 시켜냈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가수의 가창력과 노래의 음악성을 강조하는 오디션 프로들은 갈수록 참가자들에게 연기하는 배우가 되기를 주문하고 있다. 감정 연기형 가수들의 탄생이다. 왜 그럴까. 결국에는 이 또한 텔레비전 매체의 속성 때문에 일어난다. 일단 댄싱을 배제하여 시청자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은 시각적 감정 유도를 강화하게 되었다. 또한 텔레비전은 다른 영상 매체와 달리 감정적 표정을 중요하게 반영하기 때문에 전경이나 배우들의 동작이나 활동선 보다는 얼굴 표정에 포커싱이 이뤄진다. 따라사 이런 감정 연기형 비주얼이 먹힌다.

이 때문에 '슈퍼스타 K'나 'K팝 스타'에서 심사위원들은 감정의 표현을 중요하게 주문하며 이러한 주문이 시청자의 반응을 이끌어 내어 어느새 하나의 패턴이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참가자들은 혼자이거나 듀엣을 이뤄 노래 속의 주인공이 되어 감정 연기를 하기 일쑤이다. 물론 텔레비전 카메라는 그들의 표정을 잡아 담는데 바쁘며 노래에 맞춘 표정 연기는 끝나고, 심사 위원들의 박수가 쏟아진다. 그들의 연기에 심사위원들은 눈물을 쏟아낸다. 하지만 결과는 갈수록 심사 위원들의 요구와 취향에 익숙하게 자신을 적응시킨 출연자들만이 부각되고, 가수도 연기를 잘해야 한다는 점을 갈수록 확증시키고 있다. 이렇게 가창력이나 음악성과는 별도의 요인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으니 이 또한 텔레비전의 속성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K팝스타'의 한 장면. ⓒSBS.
 

이는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이는 텔레비전 매체는 그 매체의 속성에 맞게 음악 프로그램이 적절하게 구성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인위적으로 텔레비전에서 버라이어티나 댄싱을 솎아낼 필요가 없다. 오로지 음악성이나 가창력을 제외하는 것만이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한 대중음악의 본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에서 인위적으로 소리 위주의 가창력을 강조할수록 음악적 다양성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아이돌 가수 중심의 노래가 텔레비전 방송에 횡행하는 것은 문제이지만, 복고 문화를 내세우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고 있는 장르 자체를 폄하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구별 짓기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그것은 또하나의 상품화 논리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박진영은 현역 최고령 댄싱가수이고, 그의 JYP도 댄싱이 주무기인 기획사였으며 그것이 현재 케이 팝의 특징이다. 이는 양현석이 이끄는 YG도 마찬가지다. 한류라는 것도 결국 댄싱 가수에서 비롯했으니, 그것을 새삼 이들 기획사의 대표들이 부정하면서 다른 요인을 강조하는 것은 위선적이고 모순적이다.

케이팝의 핵심은 댄싱을 벗어날 수 없으며, 이는 문화할인율면에서도 피할 수 없는 태생적 숙명이다. 스스로 뿌린 씨앗을 그들 스스로 거둘 수밖에 없음이다. 가수를 평가하는 대중적인 기준에서 영상이미지는 디지털 모바일 시대에도 더 맹위를 떨칠 것이며, 정말 텔레비전 방송의 오디션 프로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청각적 요인으로 케이 팝의 경쟁력이 좌우되는 것만도 아니다. 오히려 이는 반한류적이다. 그렇지 않다면  ‘K’단어를 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몇 사람이 만들어내는 가수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개성을 가진 가수들이 공연장에 많았으면 하는 것이다. 스스로 그러한 가운데 대중이 스스로 선택해 자생적인 질서를 이뤄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럴 때 텔레비전 화면에 맞는 감정 연기와 표정 연기를 구사하는 오디오형 가수들이 음악 자체의 진화에 더 신경을 쓸 법하다. 감정에 침잠하는 것은 상처받은 영혼들에게 힐링을 주는 것같지만, 항상 감정 포르노에 빠지는 것을 항상 주의해야 한다. 감정의 과잉은 관객을 피로증에 빠지기 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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