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충(蟲)’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다. 2013년, OO 안을 가장 독보적인 빈도로 채웠던 것은 ‘일베’라는 고유명사였다. 출근, 결혼, 리얼, 설명 등 두 글자의 보통명사들이 OO 안을 채우는 것을 목격하기 시작한 것은 작년이었다. ‘OO충’이라는 용법에는 OO 안을 채우는 대상에 대한 비난 혹은 비하의 의미가 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은 아니지만 OO 안에 자주 들어가는 단어를 보면 한국인의 심리구조를 읽을 수 있을 거라 짐작하고 흥미롭게 보고 있다. 지금 여기서 살아나가고 있는 사람들이 입을 모아 비난하고 비하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다른 ‘충’들도 충분히 흥미롭지만, 일단 이 글의 주인공은 ‘설명충’이다.

‘설명충’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니 이미 설명충이 돼버린 기분이다. 설명충은 ‘알 만한 내용을 지루하게 설명하는 사람’을 뜻한다. 

문제는 누군가에게는 ‘알 만한 내용’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생소할 수 있다는 거다. 따라서 같은 설명을 해도 누군가에게는 설명충일 수, 누구에게는 설명충이 아닐 수 있다. 청취자 입장에서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용이 진짜로 ‘아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할 지점이다.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설명을 거부하는 것은 소통을 어렵게 한다.

   
애니메이션 드래곤볼의 한 장면. 리그베다위키 재인용.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개인의 선택이 사회 구조를 빚어낸다. 자기 삶의 고통의 근원을 찾는 태도, 다른 이들의 삶 역시 어렵다는 공감, 함께 잘 살 수 있는 구조에 대한 상상력, 공동체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당을 선별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된다. 선택의 준거가 될 수 있는 정보는 공교육, 대학 수업, 일상생활 등에서 접한다. 오늘날 일상생활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게 된 정보의 통로는 SNS다.

SNS에서 자주 소비되는 뉴스형태 중 하나는 ‘리스티클(Listicle)’이다. 목록(List)과 기사(Article)의 합성어로, 한 가지 명제 당 두세 문장의 간결한 설명을 덧붙여 나열하는 형식이다. ‘부유한 사람들의 몸에 밴 10가지 습관’, ‘피해야 할 여자친구 유형 13가지’ 등이 리스티클의 예다. 설명충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리스티클과 같은 뉴스형태를 선호할 것이다. 군더더기로 느껴지는 설명이 없기에 지루하지 않고 명쾌해 보인다. 그러나 논리의 기승전결 없이 두세 문장으로 간단하게 제시되는 근거에 의문이 생기지 않는 것은, 그 주장이 하나마나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는 데서 연유한다. 

예를 들어, ‘테러리스트는 미친놈이다’라는 명제는 너무 당연해 보여서 뒷받침 문장이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 삶의 서사, 광기의 기원, 광기를 부추기는 사회적 분위기를 돌아보기 위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같은 비극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한 인간의 삶을 다시 살아볼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그러려고 노력할 때 겨우 얻어지는 진실이 있고, 그런 진실에 다가가게 돕는 것이 문학이라고 말한다. 그의 문장을 인용하자면 “세상 사람들이 ‘외도를 하다 자살한 여자’라고 요약할 어떤 이의 진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톨스토이는 2000쪽이 넘는 소설을 썼다. 그것이 <안나 카레니나>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는 톨스토이도 그저 설명충일 것이다. 

   
▲ 최서윤 월간잉여 발행인.
 

뉴스는 문학과 같이 2000쪽을 쓸 수 없다. 압축적인 형식 내에서 어떤 이의 진실을 보여주려 애써야한다. 이런 제한 속에서, 사람들이 주로 뉴스를 SNS를 통해 소비하는 환경은 언론에게 더욱 어려운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충돌을 야기하는 뉴스, 자신과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포기하지 않게 돕는 언론에 대해 나도 고민하고 있다. 

일단 결론은 “설명충이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 ‘예스잼’의 꿈은 간직하자”인데, 방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지면 관계상 다음 기회에….(예스잼은 ‘yes + 재미’로 재미가 없다는 뜻의 ‘노잼’에 반대말, 재미가 있다는 뜻, 이걸 설명하고 있자니 어쩔 수 없이 설명충 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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