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전 박근혜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 시작 20분 전인 9시 40분경 평소 알고 지낸 기자로부터 한통의 메시지를 받았다.

휴대폰 창에는 ‘**참고’라는 표시 아래 “12일 VIP 신년기자회견 관련 언론사별 질의 내용”이라는 제목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언론매체별 14명의 기자들이 박 대통령에게 질문해야 될 내용의 ‘키워드’가 ‘친절히’ 적혀 있는 메시지는 그렇게 기자들에게 전파되고 있었다.

메시지에는 청와대 기자단 총 간사를 맡고 있는 서울신문과 KEY 방송사인 SBS 기자가 연이어 청와대 문건 유출과 관련한 인적쇄신과 특검 필요성 문제, 정윤회 실세설, 박지만 회장 친인척 관리 등을 질문하기로 돼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기자회견 발표가 끝나고 오전 10시 20분 경 질의응답 시간이 시작되자 이지운 서울신문 기자는 “특정인으로 지목된 비서실장과 세 비서관도 개편대상에 포함되는 것인지요? 이런 경우에 흔히 비서관급 수석 일괄 사표수리방식이 거론됐다”면서 “끝으로 사안에 대한 특검 또는 국정조사 여부를 수용하실 것인지에 대한 답변도 부탁드리겠다”고 질문했다.

두번째 질문자로 나선 이승재 SBS 기자는 “현 정부에서 정씨가 실세인지, 아니라면 이러한 의혹이 왜 나오는지 대통령께서도 생각해 보셨을 텐데. 관리를 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번에 어찌됐든 박지만 회장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부분에 대한 입장 있으실 것 같고 앞으로 친인척 관리 강화하실 건지에 대해서도 말씀 부탁드리겠다”고 말했다.

두 기자의 질문은 사전에 아는 기자로부터 받은 ‘키워드’ 내용과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내용이다. 

국민일보(남북 정상회담+5·24조치)와 머니투데이(경제인 가석방+대사면), MBN(디플레 진단과 해법+돈풀기) 순 등으로 적혀 있던 14개 매체의 질문 키워드도 실제 질문 내용과 일치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의 Alastair Gale 기자의 질문이 연합뉴스와 채널A 사이에 새롭게 배치되고, 마지막으로 CBS 기자가 집권 3년차 과제를 묻는 정도만 메시지 내용과 달랐다.  

청와대는 지난해 신년 기자회견에서 사전각본 논란이 일면서 '짜고치는 고스톱'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곤혹을 치렀다. 그리고 올해 신년 기자회견은 박근혜 대통령이 사전에 기자들의 질문을 받지 않고 진행할 것이라는 언론보도가 나왔다. 

데일리안은 이와 관련해 12일자 <각본없는 기자회견, 박 대통령 ‘진심’ 돋보였다>라는 기사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번 질의응답이 사전 조율을 전혀 거치지 않은 진짜라는 점”이라고 호평했다. 

청와대 홍보수석이 지난 6일 출입기자단 간사들과 간담회에서 "질문에 대해서는 간단한 요지만 알려줬으면 한다"고 요구했지만 청와대 출입기자 간사단은 회의를 통해 질문 내용을 조율한다면서도 “일체 청와대 측에 전달하지 않은 것으로 최종 합의”했다고 한다. 

이번 기자회견에 참여했던 한 기자도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기본적으로 기자들이 질문 아이디어를 내면 어떤 부분이 부족하다던가 해서 토론을 하고 문구 수정을 했다. 기자단에서 모두 작성되고 논의해서 질문을 정했다"고 말했다. 질문은 기자단을 통해 조율을 거쳐 최종 결정했지만 청와대에 전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자들의 질의 내용은 결과적으로 수십분 전에 인터넷에 떠돌았다. 휴대폰 메시지를 역추적한 결과 질문 키워드 내용은 12일 오전 8시 이전부터 청와대 출입기자로부터 나와 타매체 기자들과 공유한 흔적이 발견됐다. 적어도 박 대통령의 신년 기자 회견이 시작되기 2시간 전부터 질문 내용이 SNS를 중심으로 전파되고 있었던 것이다. 

   
▲ 박근혜 대통령이 12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뉴스타파> 박대용 기자는 질의응답 시간 실시간으로 질문 내용을 트위터에 올리면서 ‘각본없는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을 한껏 조롱했다. 박 기자는 ‘신내림 기자’라는 타이틀까지 얻었다. 한 누리꾼은 “박 기자가 질문을 다 미리 알고 있으면 박근혜 대통령도 안다는 얘기네. 그런데 대답이 왜 저 따위야”라고 비판했다. 사안이 이 정도였다면 충분히 청와대에서 사전에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한 청와대 출입기자는 “기자단에서 청와대에 건네주지는 않았지만 개별적으로 전달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질문 순서와 내용이 중복되지 않도록 사전에 질문을 조율한 것 뿐이라고, 청와대는 질문지를 전달받지 않았다고 억울해 할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신뢰의 문제다. 많은 국민들이 이미 ‘각본 없는 기자회견’을 비웃고 있는 건 청와대와 기자들을 믿지 못하기 있기 때문이다. 

한 기자는 “청와대와 기자들의 사전 질문지 공모설이 제기되는 것 자체로 청와대 기자단의 폐쇄적인 구조와 청와대의 소통 의지를 믿지 못하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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