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제균은 세상만사를 스펙터클과 코미디로 버무려 신파로 마무리하는 영상 상품으로 만드는데 뛰어난 감독이다. 첫 영화인 <두사부일체>에서 청소년들의 세계를 교육계의 비리와 조직폭력이 경합하는 학원폭력물로 만들고 코믹과 액션의 마무리를 신파로 장식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색즉시공>에서는 젊은이들의 사랑과 가난을 성적인 스펙터클로 만들어 아찔한 코미디에서 낙태로 피를 쏟는 여대생과의 신파 순애보로 정리하더니, <해운대>에서는 거대한 자연재해의 스펙터클을 안전불감증으로 증폭시키는 인재의 쓰나미에서 살아남으려 용을 쓰는 도시 전체의 신파 코미디로 천만 관객을 불러 모으며 작품성과 별개로 흥행성을 보장하는 티켓 파워를 과시했다.

상품성을 인정받으니 호화 캐스팅이며 엄청난 제작비를 쏟아 붓는 블록버스터 영화 제작에 어렵지 않게 투자를 유치할 수 있고, 극장가 최고 흥행시즌인 연말에 멀티플렉스 스크린을 우르르 확보하는 배급도 꽉 잡을 수 있는 흥행사다. 이번 겨울 시즌 극장가를 논란과 혹평 사이에서 후끈 달아오르게 만든 <국제시장>도 역시 스펙터클과 신파의 조합이다.

“스펙터클은 세계의 통일성을 상실한 데서 비롯되며, 현대적 스펙터클의 거대한 확장은 이 상실의 총체를 표현한다. 즉, 모든 특수한 노동의 추상과 생산 전체의 일반적 추상 양자는 스펙터클 속에서 완벽하게 번역되는데, 그 까닭은 스펙터클의 구체적 존재양식이 바로 추상이기 때문이다. 스펙터클 속에서는 세계의 일부가 세계에 대해 그 자신을 표상하며 세계보다 우위에 서게 된다. 스펙터클은 이같은 분리를 가리키는 공용어에 불과하다. 구경꾼들을 한데 묶어주는 것은, 핵심부에서 그들의 고립을 유지시키고 있는 불가역적 관계일 뿐이다. 스펙터클은 분리된 것을 재결합하지만, 분리된 상태 그대로 재결합한다.” 기 드보르의 이 글은 딱 <국제시장>에 맞춤한 해설처럼 읽힌다.

흥남 부두에 모여드는 피난민들, 폭격과 아비규환, 탄광이든 시장이든 전쟁터든 돈을 벌 수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온힘을 다하는 고된 노동, 그렇게 전쟁과 노동으로 이어지는 개인의 내력에 고난의 현대사는 그저 거대한 스펙터클로 소비된다.

   
▲ 영화 ‘국제시장’ 포스터
 

<국제시장>이 관통하는 역사와 사회를 겪어낸 윤덕수(황정민) 노인의 세계에서는 한국전이든 베트남전이든 그 전쟁이 어째서 벌어지게 됐는지, 피난민을 태우고 철수하는 미군이 한국 근현대사에서 지금까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노동 수출로 일군 경제 성장의 혜택이 재벌 경제구조의 바탕을 어떻게 다졌는지, 열 손가락 지문 찍어 주민등록 시스템 구비한 나라에서 휴전선 너머도 아닌 같은 남한 땅에 살고 있던 가족들끼리 방송국이 나서서 이산의 스펙터클을 영상콘텐츠로 기획하기 전까지 서로 애타게 그리워하는 동안 국가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재래시장이 토건세력에 휘둘려 개발의 삽날에 무너지든 말든 부동산 잘 굴려 한몫 잡으면 성공이라는 천민자본주의 때문에 먹고 살만해졌다는 21세기 한국에서 최고의 국가적 화두가 어째서 아직도 ‘민생’과 ‘경제’인지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

<국제시장>을 보는 관객들도 그런 문제에는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 어째서 그렇게 무심한 지를 묻는다면 위험한 인물로 낙인찍힌다. 윤덕수 노인의 노동과 존재양식은 영화 속에서 완벽하게 스펙터클로 확립되고, 우리가 사는 실제 세계의 모든 얼룩과 주름들을 지워 버린 매끈한 추상으로서 ‘애국’이라는 표상 아래 관객들에게 눈물과 동의 말고는 어떤 상호작용도 할 수 없도록 현재의 정세에 기여한다.

기 드보르는 스펙터클의 풍요 속에서 수행되는 허위적인 선택은 주로 물건들에 의해 의미가 부여되고, 그것들에 붙어 다니는 역할들을 늘어놓으며 이루어지는 공허한 특질들을 둘러싼 투쟁이라고 했다. 이 투쟁은 양적이며 사소한 것들에 대한 충성을 고무하기 위해 의도된 것으로서 허위적인 해묵은 대립, 지역주의, 인종주의를 소생시키며, 이런 반목들은 소비의 천박한 위계서열들을 터무니없는 존재론적 우월성으로까지 끌어 올린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일련의 끊임없는 사소한 대결들이 가소로운 이해관계들을 동반하며 거듭 설정되고, 풍요로운 소비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주로 청년과 기성세대 사이의 스펙터클적 대립이 허위적인 역할들 중에서도 맨 앞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국제시장>은 그런 허위적인 선택을 통제하기 위해 모든 요소들을 세심하게 연출해낸다. 윤덕수 노인 부부가 옥상에서 어릴 때 꿈에 대해 대화를 나누며 시작하는 첫 장면에 등장한 컴퓨터그래픽 나비는 잃어버린 여동생 막순이의 저고리 소매끝에서 국제시장 꽃분이네 가게의 포목단을 거쳐 앙드레 김의 패션 상품에까지 흔적을 남기고 의미를 부여한다. 이 나비는 CG 조작의 산물임을 감추려하지 않는 전쟁의 스펙터클 사이사이를 날아다니며, 자기 자식들과도 소통하지 못하는 성질 사나운 윤덕수 노인을 거듭거듭 젊은이로 소환해낸다.

‘기역’이 뭐냐고 묻는 어린 손녀의 질문에 잊고 싶지 않은 옛날 일 같은 것이라며 ‘기억’을 말하는 윤덕수 노인의 불통은 평생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보지 못한 노동과 희생의 결과다. 그 노동과 희생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어릴 때 헤어진 아버지의 옷을 부여안고 꼬마 덕수로 돌아가 “아버지, 이만하면 저 잘 살았지요?”라는 행복한 환상으로 완결된다. 이런 연출은 그야말로 ‘스펙터클은 비참함의 평온한 한복판에서 황폐함과 두려움에 둘러싸여 있는 행복한 통합의 이미지에 불과’한 비참함의 통일성을 이루어낸다.

<국제시장>은 삶을 구성하는 사건들에 대한 지식이나 그 사건들을 향유하는 것까지 소유한 역사적 잉여가치의 소유자들이 사회적으로 살아있는 것들의 불가역적 시간까지 독점해서, 권력이 영역 안에 집중되어 물질적 부와 더불어 시간 잉여가치조차 독점해서 사회의 표면에서 역사적 시간을 헛되게 낭비하는 데 소모시킨다.

이 사소하면서도 거대한 독점은 180억이라는 비용과 뛰어난 연기자들의 열연으로 뒷받침된다. 그리고 이 비용은 더 큰 자본을 축적하는 동력이 될 것이다. 그렇다. <국제시장>은 ‘하나의 이미지가 될 정도로 축적된 자본’의 결정판으로서의 스펙터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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