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진(秦)나라 시대 환관 중 ‘조고’라는 이가 있었습니다. 시황제가 죽은 후 조고는 시황제의 유서를 조작해 호해를 2대 황제에 올리고 자신은 재상(승상)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황제였던 호해 역시 죽였습니다. 황제는 꼭두각시, 조고는 ‘비선 실세’인 셈이지요.

조고가 자신의 영향력을 확인하고 반대파를 숙청하기 위해 호해에게 사슴을 한 마리 바치고 이를 ‘말’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진 조정은 두 분류로 갈렸습니다. 조고의 말대로 사슴을 말이라고 한 쪽과, 사슴을 사슴이라고 한 쪽이지요, 조고는 사슴을 사슴이라고 한 신하들을 죽였다고 합니다. ‘지록위마(指鹿爲馬)’란 고사의 기원입니다.

매년 연말, 교수신문은 ‘올해의 사자성어’를 뽑습니다. 이 신문에서 2014년 한국을 상징하는 사자성어로 선택한 것이, 바로 이 지록위마입니다. 총 724명의 교수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고, 이 사자성어를 27.8%가 뽑았습니다. 곽복선 경성대 교수는 “2014년은 수많은 사슴들이 말로 바뀐 한 해”라며 “온갖 거짓이 진실인양 우리사회를 강타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고사는 또한 과거 한 차례 회자된 바 있습니다.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과 관련,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서울중앙지법은 ‘정치개입은 했지만 선거개입은 하지 않았다’며 공직선거법 무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 때 수원지법 성남지원 김동진 부장판사가 해당 재판부를 비판하면서 쓴 고사가 바로 ‘지록위마’입니다.

   
▲ 지록위마
 

SNS에서 많은 누리꾼들은 이 고사에 현재 한국의 모습이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정치개입은 했지만 선거개입은 아니라는 국정원,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종하는 것 같다는 통합진보당, 모두 명확한 실체는 없고 자의적이고 비논리적인 판단을 국민들께 강요하는 모습입니다. 그러고 보니 담뱃세니 뭐니 세금은 올리고 ‘증세’는 아니라고 했던 일도 떠오릅니다.

“박근혜 정권과 딱 맞네”, “어쩌다 지록위마가 올해의 사자성어로 뽑히는 시절이 되었을까”, “그들은 정말 몰라서일까? 힘으로 우기는 걸까? 서글프다”, “민족성과 도덕성,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는 박근혜에게 딱 맞는 단어”, “지록위마 어원도 환관과 연관된 거라니”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오히려 지록위마는 약하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교수신문 설문조사에서 2위는 발을 깎아 신발에 맞춘다는 ‘삭족정리’(削足適履), 3위는 지극히 아픈마음은 있는데 시간은 많지 않고 할 일은 많다는 의미의 ‘지통재심’(至痛在心)이고, 4위는 ‘세상에 이런 참혹한 일이 없다’는 참불인도(慘不忍睹)입니다. 3~4위는 세월호 참사를 염두에 둔 것이지요.

이중 4위인 “‘참불인도’가 더 한국사회에 맞다”고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상황에선 견지망월(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본다)하고, 여론에는 마이동풍 하고, 조회에선 횡설수설 하더니, 결국에는 지록위마 되는구나”라고 지적한 트윗도 눈에 띕니다. “대한민국의 국격을 십분 고려해서 ‘양두구육’이 더 적절하지 않나”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 지록위마에 당당한 한 축인 언론에 대한 비판도 높습니다. “자정능력을 상실한 오만한 언론이 국민의 눈과 귀를 속인 한 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이 기사를 KBS 트윗으로 접했다. 공영방송이 그짓을 얼마나 많이 했더냐? 그러고도 부끄럽지 않던 모양, 기레기들의 필수조건은 강심장이어야”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물론 KBS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사슴을 보고 정부나 재판부의 주장대로 ‘말’로 보지 않고 ‘사슴’이라고 말한다면 ‘종북’이 되는 사회, 내가 말이라는데, 사슴이라고 말한다고 정당을 해체하거나 고소고발로 국민들의 겁을 주는 사회, 하루 종일 잘못된 사실에 근거한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발언이 TV를 통해 나오는 사회, 모두 지록위마의 한 단면입니다.

내년에는 과연 어떤 사자성어로 한 해를 마무리할까요? “내년 사자성어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 되었으면 좋겠다”며 희망 섞인 전망을 하는 분들도 계시고 “내년에는 누란지세(累卵之勢·달걀을 쌓아놓은 것처럼 위태롭다)가 될 듯”이라고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두 번 다시 ‘지록위마’의 해는 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한 트위터 이용자는 “지록위마는 너무 쪽팔리잖아”라고 토로했습니다. 사슴을 가리켜 사슴이라고 하는 사회, 가끔 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도 폭력으로 강요하지 않는 이상 용인해줄 수 있는 사회. 그 때는 언제 올까요? 고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사슴을 기다리는 국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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