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윤두현 청와대 홍보수석이 말했다. “대통령께선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은 자유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지켜낸 역사적 결정으로 평가하십니다.” KBS·MBC 등 대다수 언론사가 이날 메인뉴스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결정”이란 대통령 발언을 별다른 비평 없이 그대로 전했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냈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은 사법기관이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인 정당을 해산시킨 일이다. 정당의 자유와 정치적 결사의 자유는 헌법에 보장된 민주주의의 원리다. 정당은 생각이 다르다고 소수를 배척하지 않는 자유민주주의의 징표다. 헌재 판결을 두고서는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한 결정”이라고 말하는 게 옳다. 그런데 왜 대통령은 “지켜냈다”는 말을 했을까. 

TV조선은 20일 대통령 발언을 두고 “종북을 털겠다는 단호함도 함께 담았다”고 보도했다. 대통령 발언을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내보낸 다수 언론에 비해 차라리 솔직한 지적이다. 대통령이 언급한 자유민주주의와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민주주의가 다르다는 사실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 대통령이 언급한 자유민주주의는 다름 아닌 ‘반공이데올로기’이자, 박근혜정부 자신이다. 

   
▲ 12월 20일자 KBS '뉴스9'의 한 장면.
 

헌법재판소는 이석기 등 RO모임의 일명 ‘국가기간시설 파괴 계획’을 주요 해산 근거로 들었다. 하지만 헌재는 RO모임이 자유민주주의 질서에 해악을 끼칠 구체적 위험성을 찾지 못했다. 예컨대 폭력투쟁에 대한 실행능력, 세부적인 계획 등이다. 허무맹랑한 RO모임을 ‘구체적 위험성’으로 포장할 팩트를 찾지 못한 헌재는 ‘진정한 목적’을 강조했다.

헌재는 “통합진보당의 진정한 목적과 활동은 폭력에 의해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북한식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헌재가 북한식 사회주의와 연결 지은 통합진보당의 ‘진보적 민주주의’ 또한 정치사상에서 통용되는 개념으로 ‘종북’과 곧바로 연결될 수 없다. 통합진보당의 대북관은 정치적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정당해산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헌재가 밝힌 또 다른 해산 근거인 폭력사건이나 부정경선 등은 다른 정당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헌재 판단대로라면 살아남을 당이 없다. 하지만 헌재는 RO모임의 의미와 그들의 능력을 과대 포장한 뒤 평소 통합진보당의 대북관을 연결 지었다. 헌재는 이석기를 비롯한 RO모임의 녹취록을 10만 당원을 지닌 대한민국 제3정당 통합진보당 전체의 강령과 행동으로 연결 지었다. 

헌재는 언론이 덧칠해놓은 ‘이석기=종북’ 프레임을 정당으로 확대시킨 것이다. 통합진보당의 해산은 대한민국 정부가 정통성 위기에 놓일 때마다 꽃놀이패로 썼던 반공이데올로기를 가장 극단적으로 활용한 사건이다. 이런 맥락을 무시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냈다”는 대통령의 발언을 그대로 전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언론은 반성해야 한다. 

반공에 기댄 선동이 과거보다 쉽지 않은 상황에서 대통령은 국가정보원 대선개입의혹과 연이은 인사 참사, 세월호 참사 부실 대응, 정윤회 국정개입의혹 논란 등을 거치며 조선일보에게조차 비판을 받는 처지에 놓였다. 이런 상황에서 사법부는 당선 2주년에 맞춰 통합진보당 해산이라는 정치적 판결을 내놓았고, 대통령은 또 다시 여론의 늪에서 벗어나 기사회생할 기회를 갖게 됐다. 권력의 감시자인 언론마저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냈다”는 대통령의 ‘거짓말’에 속아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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