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발호는 역사적으로 국가 멸망의 상징적 징후였다. 중국 후한 말 권력을 휘둘러 나라를 멸망하게 만든 ‘십상시(十常侍)’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십상시’가 거론되는 ‘정윤회씨 국정개입 보고서’ 사태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나라 전체가 흔들린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표현대로 엄중한 사태임은 분명하다.

사태와 관련된 경찰관인 최아무개 경위가 청와대 회유와 억울하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천주교 신자라는 경관이 오죽하면 소중한 생명을 버렸겠는가. 사태의 진실이 명백하게 밝혀져야 한다는 얘기다.   

검찰은 ‘정윤회 국정 개입 보고서’ 내용은 허위로, “비선의 국정개입으로 볼 수 있는 뚜렷한 정황이나 비밀회동이 없었다”는 잠정 결론이라고 한다. ‘문건 유출’ 경위는 서울 경찰청 소속 경찰관 2명에 의한 것이라고 사실상 결론을 냈다는 것이다. 최 경위가 다른 경찰관인 한아무개 경위로부터 청와대 보고서를 건네받아 언론사 등에 전달했다는 게 결론 내용이다.

정윤회씨 등 비선의 국정개입이 없었다는 검찰의 잠정 결론이지만, 정씨 딸의 아시안게임 승마대표 선발 논란과 박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문화체육관광부 국장과 과장의 전격 경질 과정을 보면 비선의 개입 정황들이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난다. 정씨의 입김이 통한 것인가. 박 대통령이 문체부 국장과 과장의 이름을 콕 찍어 ‘나쁜 사람’이라고 유진룡 당시 장관에게 직접 경질 지시를 하도록 만든 정보를 누가 전달했는지 궁금증을 떨칠 수가 없다.

유 전 장관이 거론한 김종 문체부 차관과 이재민 청와대 총무비서관의 ‘부당한 인사개입’은 어찌 된 것인가. 이재만 비서관이 ‘브이(대통령을 지칭)’를 움직여 지시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지 않는가. ‘근본도 없는 X’라는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이나 김덕중 국세청장의 갑작스런 경질에 대한 의혹도 꼬리를 물기는 마찬가지다.

   

▲ 왼쪽부터 정윤회 씨, 박근혜 대통령, 박지만 EG회장. ⓒ연합뉴스

 

 

검찰이 문서유출자로 보는 최 경위의 영결식에서 유족들은 “진실이 왜곡됐다”며 “억울해서 어떻게 하느냐”고 오열했다고 한다. 검찰이 수사가 아니라 조작을 했다는 의혹을 갖는 사람들이 어찌 이들 유족들뿐이겠는가.

종합편성채널인 jtbc는 “청와대가 한 경위를 회유한 음성과 그 구체적인 정황들을 모두 확보하고 있다”고 보도해 최 경위 유서의 청와대 회유 내용을 뒷받침했다. 청와대는 회유 의혹을 부인하며 펄쩍 뛰지만, “자신이 있으면 고발 안 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왜 미적거리는가. 청와대는 사태와 관련해 <세계일보>를 비롯해 건듯하면 언론사를 고발하지 않았는가.

“청와대가 문건유출을 조작하려고 오아무개 전 청와대 공직비서관실 행정관에게 거짓진술을 강요했다”는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비서관의 주장은 충격적이다. 그의 주장은 청와대가 회유와 거짓 진술의 강요로 검찰의 조작에 개입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청와대의 조작 개입 의혹은 박 대통령이 파문의 보고서가 ‘근거 없는 풍설을 모은 찌라시’로 그런 문서의 유출은 ‘국기문란 행위’라고 규정함으로써 보고서 사건의 ‘수사지침’을 내놓으면서 이미 예정된 수순 아니었겠는가. 이런 ‘수사지침’을 받은 검찰 수사가 조작 쪽으로 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때 일부 승무원들의 행동을 ‘살인과 같은 행위’라고 공식 입장을 밝혀 ‘정치적으로 부적절하다’는 외신들의 비판을 받았었다. 독일의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경우 “박근혜 대통령의 단어 선택은 도를 지나쳤다”며 “법정으로 보내질 현안에 대해서는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박 대통령이 보고서 내용은 허위라며 문서유출이 ‘국기문란’이라고 강도 높은 ‘수사지침’을 내린 날 청와대 민정비서관실이 오아무개 전 행정관에게 거짓 진술을 강요한 조사가 이뤄졌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새누리당 지도부 등과 만난 자리에서도 ‘정윤회씨 국정개입 의혹’과 관련해 ‘근거없는 얘기들’이라고 ‘수사지침’을 거듭 강조하고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문건 유출자에 대한 지목도 청와대에서 나왔다. 청와대의 ‘수사지침’과 ‘수사개입’의 행태가 강도 높게 계속된 꼴이다. 검찰 수사 결과가 박 대통령이 규정한대로 각본처럼 나올 수밖에 더 있겠는가. 

   

▲ 지난 11월 28일 세계일보가 보도한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 문건 사진. 출처=세계일보 지면

 

 

문제의 본질은 박 대통령이 자신은 ‘신성 불가침’의 존재로서 자신과 자신을 보좌하는 측근은 아무 잘못이 없는데 외부의 문제 제기로 ‘근거 없는 흔들기’가 벌어지고 있다고 보는 문제의 인식이다. ‘청와대 문고리 3인방’을 두고 “15년간 나와 같이 고생한 사람들이 말썽을 일으켰다면 나와 같이 일할 수 있었겠느냐”는 박 대통령의 발언에서 자신을 신성시하는 인식의 강고함이 드러난다.

잘되는 것은 ‘신성한 자신’에서 비롯되고 잘못되는 것은 모두 외부인 ‘남’ 때문이라는 인식은 바로 황제적이며 독재적인 발상의 뿌리다.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이 독재자 아버지가 쓴 대본을 이어받고 있다”는 미국 <워싱턴포스트(WP)>의 비판이 주목된다.

조용천 전 청와대 비서관은 “정윤회와 문고리 3인방이 ‘윤필용 사건’ 같은 부도덕하고 위험한 일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윤필용 사건’은 1973년 박정희 대통령 집권 때 뚜렷한 증거도 없이 쿠데타라는 어마어마한 혐의가 씌워져 처벌을 받았지만 무죄로 밝혀진 조작 사건이다. 독재와 조작의 세습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검찰 수사가 박 대통령의 ‘수사지침’대로 끝난다면 의혹들이 남을 뿐만 아니라 유언비어처럼 또다른 의혹들로 확대재생산될 것이다. 박 대통령의 강고한 비호로 비선과 측근들의 ‘발호’가 더욱 기승을 부릴지 모른다. 

이런 조작적 사태의 진행에 일반 국민들의 마음이 편할 리 있겠는가. 비선과 측근들의 국정개입 의혹의 여파로 박 대통령 지지율이 40% 아래로 떨어졌다. 박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대한 ‘부정 평가’가 52.1%로 과반을 넘어섰고, ‘긍정 평가’는 39.7%에 그쳤다는 <리얼미터>의 여론조사 결과는 그런 국민들의 마음이 나타난 것 아니겠는가.

<격몽요결>에서 이율곡은 자신을 절대로 잘못이 없다는 ‘허물없는 위치(無過之地)’에 놓으면 자칫 허물이 더 커지고 비방이 더 거세질 수 있다고 말한다. 어느 누구가 문중자에게 비방을 멈추게 할 길을 묻자 율곡은 ‘변명하지 않는 것(無辨)’이라고 대답했다.

박 대통령이 정치를 제대로 했으면 비선 실세나 문고리 권력의 ‘국정 농단’이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자신의 잘못과 비선, 측근들의 ‘국정 농단’은 애써 감추고 ‘농단의 유출’에만 불같은 화를 낸다면 그에 대한 국민들의 비방은 더욱 거세져 지지율의 추락은 계속될 것이다. 

박 대통령이 3년 남짓 남은 임기 동안 ‘남 탓’의 정치를 계속한다면 그에 대한 지지율 추락과 함께 그의 임기가 국정의 실패로 끝나버릴 위험성이 너무나 높다. 악화되기만 하는 북한 핵문제와 남북 관계는 물론이고 경제는 침체돼 실질 실업률이 10%를 넘는 등 제대로 되고 있는 게 뭐가 있는가. 

박 대통령의 국정 실패는 국민과 국가의 불행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게 근본적인 문제다. 박 대통령은 국민과 국가 불행의 최고책임자가 되려는가.  

박 대통령이 더 이상의 사태 악화를 막으려면 모든 잘못의 책임을 인정하고 ‘국정 농단’의 진실이 밝혀질 수 있도록 청문회든 특검이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진정성부터 먼저 보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음습한 곳에서 병균이 창궐하듯 비밀주의의 폐쇄적인 장막 안에서 온갖 음모와 비리가 판을 치게 될 것이며 국민들의 분노는 폭발해 국민들이 직접 나서는 사태가 벌어지게 될 것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