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지하철역에서 5~6분만 걸으면 남대문 사옥이었거든 오늘은 조금 헷갈리네. 이쪽 출구로 나가면 되는 건가?”

2008년 해고된 뒤에도 우장균 YTN 기자는 서울 남대문 사옥을 자주 찾았다. 하지만 상암동 신사옥으로 가는 길은 낯설었다. 1일 오전 6시 30분 아침 출근길, 지하철은 고요했다. 아직 앉을 자리가 남아있었다. 복직 후 첫 출근을 하는 우 기자와 함께 앉았다. 주변에는 잠에 취한 직장인들, 지하철 바닥을 쓸고 닦으려는 환경미화노동자, 영어책을 들고 단어를 외우고 있는 학생들이 각자 하루의 시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그의 목소리는 가볍고 상쾌했다. 우 기자는 “가족들이 다 자고 있어서 출근 인사를 못하고 나왔다”며 “아직 (사측으로부터) 근무 지정을 받진 못했지만 우리 조합원들과 함께 출근하려고 서둘렀다”고 했다. 우 기자는 “새벽에 몇 차례 깼다”며 “알람을 새벽 5시 50분에 맞췄는데 10분 전에 눈이 저절로.(웃음) 몸이 긴장을 하나봐”라고 했다. 

우장균 YTN 기자는 지난달 대법원으로부터 복직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은 노종면‧조승호‧현덕수 기자에 대한 해고조치는 ‘정당’, 권석재‧우장균‧정유신 기자에 대한 해고조치는 ‘부당’하다는 항소심을 확정지었다. 아쉬움이 컸지만 그래도 첫 출근길에 올랐다.

   
1일 복직 첫 출근길에 나선 우장균 YTN 기자가 지하철역에서 출구를 찾아 헤매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우 기자는 2008년 해고 당시 40대 중반이었다. 6년이 지났으니 지금은 50대 초반이다. 그는 80대 노모(老母)를 모시고 산다. 아들의 복직 판결 소식을 들었을 때 어머니 마음은 어땠을까? 우 기자는 “선고일이 잡혔을 때 노심초사하실까 말씀을 안 드렸다”며 “어머니는 아들의 복직 소식에 하염없이 기뻐하면서도 나머지 3명에 대한 걱정을 하셨다”고 했다. 그 세대 대다수가 그렇듯 우 기자 어머니도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했지만, 지난 대선에선 아들 생각에 선택을 바꾸셨다고. 

6년이 흘렀다. 14살이던 우 기자의 아들은 어엿한 20살 청년이 됐고, 초등학생이었던 딸은 어느덧 중학생이다. 희망펀드 등 노조로부터 받은 지원으로 경제적 어려움은 크게 겪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들로부터 “아빠가 해고 됐는데 우리가 이렇게 많이 먹어도 돼”라는 말을 들었을 땐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우 기자는 “온전한 가장의 역할을 제대로 못했는데 정말 의연하게 성장해주었다”며 아들과 딸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그의 가방에 든 것은 노트북이었다. 해직 이후 남는 시간 동안 ‘동네 도서관에서 책이나 읽어 보자’라는 마음을 갖게 됐다. 탐독은 집필 의지로 이어졌다. 그는 소설까지 낼 생각에 독서와 글쓰기에 더욱 빠져 들었다. 우 기자는 “조선의 역사, 한국 근현대사를 참 많이 읽었는데 조정래 작가의 ‘황홀한 글감옥’이라는 책을 읽고 소설에 도전했다”며 “선뜻 나서는 출판사는 없었으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쓴 원고를 두고 얘기는 오가고 있다”고 전했다. 최근 현덕수 기자와 함께 남미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고, 제과‧제빵 기술도 익혔다. “60대, 70대가 되면 작은 카페 같은 거 열어서 내가 만든 커피와 과자를 선후배들과 나누고 싶어. 김 기자도 그때 놀러 와.” 그러다 복직 판결을 받았다.

사측은 판결 이후 복직 기자에게 부서 배치를 내리고 있지 않다. 되레 YTN은 판결이 있던 날 “징계 해고의 수위가 적절치 않았다고 판단한 것일 뿐 당시에 이뤄졌던 이들의 모든 행위가 정당한 것이었다는 뜻의 면죄부를 준 것이 아니라는 점도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며 징계 가능성을 시사했다. 복직 후 바로 징계를 내리는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질까.

우 기자는 “복직하는 우리 3명에 대해 ‘해고 조치’가 나오더라도 놀랍지 않은 상황”이라며 “(YTN 건물이 있는) 남산에 보낸다는 소문도 있는데, 그래도 우리 YTN은 MBC만큼 넓지 않아서 (사측도) 골치 아플 거야.(웃음)” 

이날 오전 8시, YTN 사옥 앞에서는 복직 언론인의 첫 출근을 기념하는 언론노조 YTN 지부의 환영식이 있었다. YTN으로 돌아가 그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우 기자는 “언론 탄압을 하는 박근혜 정부 아래서는 원래 하던 일을 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면서도 “우리 6명이 모두 복직한다고 생각하면, 현장에서 특종을 하는 기자보다 워싱턴포스트의 ‘벤자민 브래들리’처럼 해보고 싶네. 외압으로부터 돌발영상 같은 YTN 방송을 지키는 그런 방패 역할 말이야”라고 했다. 

고 벤자민 브래들리(Benjamin Bradlee)는 워싱턴포스트의 전설적인 언론인이다. 1970년대 미국 닉슨 대통령의 사임의 발단이 된 ‘워터게이트’ 특종 보도를 이끌었다. 그는 밥 우드워드, 칼 번스타인 기자의 워터게이트 취재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이와 더불어 꼼꼼한 사실 확인을 요구했다. 취재 결과물을 신문에 게재토록 하는 최종 ‘결정’을 내려 이름을 드높였다. 

이미 상암동 YTN 사옥 앞에는 YTN 지부 조합원 80여 명이 해직 언론인의 복직을 축하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 앞에 선 우 기자는 “지금까지 여러분이 해직 기자를 보살펴주고, 회사 간부와 어려운 싸움을 했었는데 이제는 여러분보다 앞장서 나머지 3명 복직을 위해 싸워나겠다”고 다짐했다.

비록 대법원으로부터 복직 판결을 받지 못했지만 조승호‧현덕수 기자도 첫 출근 행사에 참여했다. 노종면 기자는 뉴스K 편집회의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조 기자는 “매일 아침 아이들 챙기는 역할을 했는데 오늘 아침은 깨우지 못할 거라 했다”며 “아이가 그 이유를 물었고, ‘네가 수업 시간에 예습을 하듯 나중에 복직하면 어떤 심정일지 예습하러 YTN에 간다’고 대답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최대한 빨리 이 기분 그대로 복직하러 찾아올 것”이라고 했다. 이날 조합원 행사에 10여 분 늦은 현덕수 기자는 “복직도 우리 동료 3명보다 조금 늦은 ‘지각’이지만, 이 정문을 통해 다시 출근하는 YTN 기자가 되겠다”며 강한 복직 의지를 드러냈다. 

   
오전 8시 YTN 상암동 사옥앞에서 열린 동료들의 환영행사가 끝나고 복직한 3명의 기자와 조승호, 현덕수 해직기자가 함께 손을 잡고 YTN 사옥에 들어서고 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몇몇 조합원들은 이들 5명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한 조합원은 “2008년, 기자 생활을 얼마하지 않았을 때 (해직사태로) 정말 고통스러웠다”며 “그러나 ‘해직 선배들이 돌아오는 자리에 반드시 있겠다’는 당시 다짐으로 여태 버텼다. 지금처럼 나머지 선배 세 분이 돌아올 그날까지 이 자리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사측이 미루고 있어서 기자 출입증이 아닌, 사원 방문증을 발급받았지만 우 기자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노조 사무실에서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동료들과 덕담을 나누었다. “간부들과 만나는 게 다소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부서 인사도 하고 그럴 생각이에요. 어떻게든 나머지 3명이 돌아올 수 있도록 토대 역할을 하는 게 복직한 사람들의 몫 아닌가. 난 그렇게 생각해. 버티고 내가 먼저 싸워야지.” 이들의 첫 출근을 반기는 것일까 아니면 모두가 복직하지 못한 아쉬움 때문일까. 이날은 함박눈이 내렸다. 

   
'돌발영상'을 함께 만들었었던 임장혁 기자(오른쪽)가 정유신 기자를 환영하며 포옹하고 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권석재, 정유신 기자가 방문증을 받기 위해 서명하고 있다. 복직된 3명의 기자들에게 회사는 아직 출입처와 업무, 출입ID카드 등을 주지 않은 상태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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