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1. 2014년 11월 7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인터스텔라>가 미국에서 개봉했다. 3561개의 스크린. 전체 스크린이 35,794개이니 채 10%가 되지 않는다. 이 영화는 개봉 당일만 박스 오피스 1위를 하더니, 다음 날부터는 <빅 히어로 6(Big Hero 6)>에 밀려 2위를 기록하다가 <헝거게임 – 모킹제이>(이하 <헝거게임>)가 개봉한 11월 21일에는 4위로 내려앉았다. <헝거게임>은 개봉 3일만에 1억 2천 1백만 달러의 수익을 기록해, 17일 동안 1억 2천만 달러를 기록한 <인터스텔라>를 간단히 넘어서 버렸다. <헝거게임>의 스크린은 4151개. 

장면 2. 2014년 11월 6일, <인터스텔라>가 한국에서 개봉했다. 1090개의 스크린. 그러나 총 매출의 67.6%를 기록하더니 이후 1300개 내외의 스크린을 장악하면서 3주 내내 박스오피스 1위는 물론이고, 27일 현재 7백 4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으며 여전히 흥행 1위를 달리고 있다. 27일 현재 <헝거게임>은 63만, <카트>는 73만 명을 동원했다. <인터스텔라>는 전체 2500여개의 스크린 가운데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두 상황을 보면 뭔가 이상하지 않는가? 미국에서는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지 못한 <인터스텔라>가 왜 한국에서는 이렇게 강한 흥행을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미국에서는 엄청난 흥행을 기록하고 있는 <헝거게임>이 왜 한국에서는 유독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일까? 결정적인 질문.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또는 이것은 어떤 징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인터스텔라>의 엄청난 흥행에 대해 (진보적 매체라고 할 수 있는) <한겨레>에서는 교육열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태양계 바깥의 우주를 엄청난 스펙터클로 전시하는, 다르게 말하면 상당히 어려운 현대 과학 이론을 총동원하는 이 머리 아픈 영화를 한국에서 유난히 선호하는 이유가 40대 아버지가 과학 공부의 일환으로 자식들과 함께 관람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터스텔라>를 보기 전 반드시 알아야 하는 과학 이론 10’이라는 인터넷 지식을 먼저 공부한 뒤 관람한다는 팁도 덧붙혔다. 이 분석이 맞는지 틀렸는지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명확한 것은 이런 현상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터스텔라>가 흥행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먼저 절반 이상을 차지한 스크린 독과점에 있다고 봐야 한다. <카트>나 <다이빙 벨>을 보려고 해도 영화를 찾아 극장 순례를 해야 하는 상황이 지금 우리의 처지이다. <헝거게임>도 개봉일 고작(?) 587개의 스크린을 차지했을 뿐이다. <카트>는 그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더 문제인 것은 좋은 시간대의 스크린은 <인터스텔라>가 대부분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극장에 영화를 보러 온 이들은 <인터스텔라>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렇게 관객들의 자유로운 관람권을 침해하는 스크린독과점은 반드시 제도적, 법적으로 보완해야 한다. 

그렇다고 내가 <인터스텔라>가 형편없는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우수한 영화임에 분명하다. SF영화의 한 획을 그을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흥행할 영화인지는 의문이다. 아무리 크리스토퍼 놀란의 명성이 있고(기존의 그의 영화는 이렇게 흥행하지 못했다), 작품의 압도적인 스펙터클이 있다고 하더라도 <인터스텔라>는 기존의 SF영화와는 좀 다른 영화이다. 
 
사실 SF영화는 1968년까지 B급 영화였다. 저예산으로 급하게 만들어 A급 영화에 끼워 팔았던 영화가 A급 영화가 된 것은 1968년의 <2001, 우주 오딧세이>와 <혹성탈출> 때문이었다. 이 영화들에 이르러서야 최고의 감독이 최고의 배우와 함께 작업하는 장르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1977년은 SF영화의 신기원을 이룬 해였다.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와 스티븐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가 개봉하면서 최고의 박스오피스 기록을 세웠다. 이 두 명의, 현명하고도 테크놀로지에 밝은 뉴 할리우드 감독들 때문에 이제 SF영화는 블록버스터라는 신조어와 조우하게 되었고, 당연히 그 핵심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후 박스오피스에서 수위를 차지한 영화는 절반 이상이 SF영화였다. 

이후 누구나 아는 것처럼, 할리우드는 SF영화의 시대였다. 그야말로 SF영화는 모든 장르를 빨아들이는 진공청소기였다. 서부극, 호러영화, 전쟁영화의 컨벤션을 장르 안에 녹여내면서 액션 블록버스터라는 하이브리드 장르로 거듭났고, 이후 장르의 자체 진화는 계속되었다. 그래서 매년 우리가 여름방학만 되면 극장에서 SF영화를 만나다가 이제는 겨울방학, 또는 시간을 가리지 않고 만나는 장르가 되어버렸다. 때문에 현대 미국영화의 장르는 오직 SF영화일 뿐이다. 

그런데 <인터스텔라>는 기존의 영화와 많이 다르다. 우주 여행이라는 시각적 볼거리를 고증된 과학 이론으로 재현하는 것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에일리언> 같은 호러, <아바타> 같은 서부극, <우주 전쟁> 같은 전쟁영화의 컨벤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에 기반한 신파적 이야기를, 단지 우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을 따름이다. 표면적으로는 화려한 우주 과학 이론을 배경으로 하지만, 영화의 핵심은 딸을 떠나는 아버지의 마음, 그 아버지에 대한 딸의 마음, 그리고 아버지가 딸을 위해 희생하는 것들인데, 바로 그런 요소가 한국인의 정서와 깊이 공명하는 것 같다. 때문에 김윤아 평론가는 이 영화에 녹아있는, “가부장적 가족주의에 기반한 신파적 정서가 한국 사람 핵심 정서”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하게 만든다고, 쓰게 말하기도 했다. 

<7번방의 선물>이나 <아저씨> 같은 ‘딸 바보’ 아버지의 이야기에 우리는 왜 이토록 열광하는가? 왜 우리 시대 아버지는 이런 방식으로만 소모되고 있는가? 아버지의 사랑을 그린 영화를, 과학 이론을 공부시킨다는 명목으로 자녀들과 함께 관람해야만 하는 우리 시대 아버지의 운명. 그것은 아버지에게 또 얼마나 큰 짐을 지우는 것인가? 아버지와 자식이 교류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나는 지금 이런 아버지의 호출이 그리 반갑지 않다. 왜 우리 시대 아버지는 아이들 손을 잡고 <카트>를 보려고 하지 않을까? ‘비정규직의 천국’인 이곳에서, 심지어 비정규직의 처우를 개선하라고 호소하니 정규직의 처지를 비정규직과 비슷하게 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는 관료들이 있는 상황에서, 왜 가장 시급한 문제를 다룬 <카트>에는 이토록 무관심한 것일까? 아이들에게 정규직의 희망을 심어주려는 아버지의 배려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과연 옳은 것일까? 

이런 생각도 해본다. 하다 못해 우리 시대 아버지는 <헝거게임>을 자식들의 손을 잡고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식민지와 독립 운동의 경험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식민지 피지배인들의 독립 의지를 그린, 그것도 <인터스텔라>와 같은 SF 장르를 왜 외면하는 것일까? 영화를 통해 과학 공부를 시키는 것이, 현재의 위치를 바로보고 불의에 저항해 결국 성취하는 영화보다 더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있는 것일까? 미국의 청소년과 성인들이 단지 생존‘게임’으로 <헝거게임>을 본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마저 부러운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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