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18일 전두환의 명령을 받은 공수부대 대원들은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광주 전남대 대학생들과 시민들을 쇠심이 박힌 살상용 진압봉으로 내리치고, 군용트럭에 태워 끌고 갔다. 그렇게 작전명 ‘화려한 휴가’가 시작됐다. 

계엄군의 학살로 인한 공식 사망자 수 124명, 행방불명자 수 70명, 상이자 수 1,628명이다. 계엄군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였고, 시민들이 탄 버스를 향해 집중사격하기도 했다. <오월의 노래>에 나오는 가사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디 갔지”는 과장이 아니었다. 

   
▲ 완장을 찬 위생병마저 페퍼포그 차량 앞에서 저항의지도 없는 학생을 곤봉으로 힘껏 내려치고 있다
 

이때 조선일보는 계엄군의 학살과 시민들의 저항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가 임시취재반까지 내려보내 광주 상황을 왜곡했다. 5월 25일 7면에 광주 시민을 ‘난동자’라고 표현한 김대중 기자(현 주필)의 ‘잔인한’ 르포를 실었다. 

김대중 기자는 “그 고개의 내리막길에 바리케이드가 처져 있고 그 동쪽 너머에 ‘무정부 상태의 광주’가 있다. 쓰러진 전주·각목·벽돌 등으로 쳐진 바리케이드 뒤에는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고 했다. 

   
▲ 조선일보 1980년 5월25일 7면 기사
 

사설 <악몽을 씻고 일어서자>에서는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계엄군은 일반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극소화한 희생만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전두환이 12·12 군사 쿠데타로 헌정 질서를 파괴하고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일에 침묵했던 조선일보는 그 뒤 전두환을 맹목적으로 찬양했다. 1980년 8월 22일 전두환이 전역하고 육·해·공 3군 주요 지휘관들이 전두환을 차기 국가원수로 추대할 것을 결의하자 조선일보는 다음날 3면을 털어 <인간 전두환>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 조선일보도 아카이브에서 지워버린 1980년 8월23일자 3면 기사
 

이 기사에는 <육사의 혼이 키워낸 신념과 의지의 행동>, <사에 앞서 공…나보다 국가 앞세워>, <자신에게 엄격하고 책임 회피 안해>라는  부제가 붙었다. 조선일보는 자신도 낯 뜨거웠던지 아카이브에서 이 3면을 삭제했다.   

87년 6월 항쟁 때도 ‘온유하라’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 무너졌던 1987년도에도 조선일보의 친권력적 보도는 계속 이어졌다. 서울대 학생 박종철이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지만 조선일보는 ‘고문’이란 단어를 빼고 <조사받던 서울대생 사망>이라고 전했다. 동아일보가 고문당한 정황을 구체적으로 보도한 것과 달랐다. 

‘직선제 개헌이 불가하다’는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 이후 시민들의 저항은 거세졌고, 6월 9일에는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사설 <랑에 섰다/ 다음에 올 것을 오지 않게 하려면>에서 “야권과 학생들은 최대의 슬기와 절제 그리고 온유함의 자세로 되돌아갈 것을 당부한다”고 했다. 

<조선일보 대해부>는 이 사설에 대해 “‘헌정 중단’의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며 시위 자체를 촉구했다. 계엄 선포 등 ‘일종의 협박’으로 읽히는 내용이었다”고 평가했다.  

전두환을 지지하던 조선일보는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 평화적 정부 이양을 약속한 6·29 선언을 발표하자 이전의 논조를 바꿨다. 

이 신문은 2면에 <위대한 나라로의 전진을 위해/대전환의 계기가 된 노 대표의 극적 선언>이라는 통단 사설을 실었다. <조선일보 대해부>는 “그야말로 조선일보가 보인 ‘변신의 극치’였다”고 지적했다. 

조선일보는 노태우 정권에서도 왜곡 및 조작보도를 멈추지 않았다. 1991년 4월26일 명지대 학생 강경대가 전경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졌지만 그 책임을 “시위문화의 문제”라며 시위대에 돌렸다. 

   
▲ 조선일보 1991년 5월5일자 3면 기사
 

이어 ‘시위문화를 바꾸자’란 캠페인을 전개했다. 하이라이트는 5월5일 실린 김지하의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치워라>라는 특별 기고문을 실은 것이었다.     

정권-조선일보-김지하-박홍이 만든 공안정국

곧바로 조선일보는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를 왜곡보도했다.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이 5월8일 서강대 옥상에서 분신 자살하는 일이 발생했다. 서강대 총장 박홍은 그날 기자회견을 열고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하고는 노동자와 학생들에게 자살을 강요했다는 주장이다.  

박홍은 자신의 주장에 대해 별다른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조선일보는 박홍의 주장을 띄우며 5월9일 <“분신 현장 2~3명 있었다”: 목격교수 진술/검찰, 자살 방조 여부 조사>란 기사를 내보냈다. 동아일보가 <“옥상엔 혼자 있었다”:서강대 운전사 경찰에 밝혀>라는 기사를 내보낸 것과 정반대였다. 

   
▲ 한겨레 지난 2월14일자 머리기사
 

서울 고등법원은 2014년 2월 강기훈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고, 현재 대법원 판결이 남아 있다. 강기훈은 자신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23년 째 법정 투쟁을 하고 있다. 5·18 희생자들부터 강기훈까지 조선일보의 왜곡보도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은 셈이다. 

 

“김일성 사망” 세계적 특종이 세계적 오보로

조선일보는 1986년 11월 16일 1면에 <김일성 사망설>을 보도했다. 그리고 휴간일인 17일 <김일성 총맞아 피살>이라는 호외를 냈다. 조선일보는 자신의 보도에 대해 <조선일보 세계적 특종-16일자에 최초로 보도>라는 기사를 써 자랑하기도 했다. 

18일에는 1면 머리기사로 <김일성 피격 사망-북괴 권력투쟁 진행 중>으로 김일성 사망을 단정적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이 세계적 특종은 48시간만에 세계적 오보로 판명났다. 김일성이 18일 오전 10시 몽고 공산당 서기장 영접을 위해 평양공항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놀라운 건 오보에 대한 조선일보의 태도였다. 조선일보는 오히려 “수령의 죽음까지 고의로 유포했다”며 그 책임을 북한에 떠넘겼다. 휴전선 북방의 북괴군 확성기 방송에 의해 피살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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