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라 라우 감독의 <과계>는 한 자녀 정책 때문에 둘째를 낳는 것이 불법이 되는 이웃 나라 중국 본토에서 홍콩으로 만삭의 아내를 몰래 데려가기 위해 법과 영토의 경계를 넘는 젊은 부부 이야기가 한 축을 이루는 영화다.

영화의 한자 제목 ‘과계(過界)’는 ‘경계를 넘는다’는 뜻이다. 홍콩의 신인 감독 플로라 라우는 이 첫 장편으로 제66회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되면서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이후 예전의 국경과는 다른 새로운 경계가 가르고 있는 대륙과 홍콩의 문제를 사실적으로 가시화한다.

허름한 동네에 사는 젊은 부부가 있고, 그들에게는 어린 딸이 있다. 집 바깥에 드나드는 건 딸과 남편뿐, 아내는 아무리 더운 날씨에도 창문 하나 활짝 열어젖히지 않는다. 누가 볼까 집안에만 꼭꼭 숨어 지내는 까닭은 아이를 가졌기 때문이다. 한 자녀 정책으로 철저히 출산을 통제하는 중국 사회에서 두 번째 아이를 낳는다는 건 불법이다.

남편의 일터는 바다 건너 홍콩이다. 거기서 남편은 부유층 집 안주인 리여사의 운전기사로 일한다. 호화로운 아파트, 집안을 장식한 값비싼 미술품들이며 가구, 사치스런 옷치레를 하고 개인 기사를 부리던 리여사의 삶이 갑자기 흔들린다. 남편이 파산하고 사라져버리면서 갑자기 가난이라는 걸 겪게 되었기 때문이다.

   

▲ 영화 ‘인터스텔라’ 스틸컷

 

 

정신적 바탕 없는 물질적 풍요의 불안과 공허와 홍콩에서 아이를 낳으려는 가난한 젊은 부부의 간절함 사이에 있는 경계를 어떻게 넘을 것인지를 묻는 이 영화 이후인 2014년, 홍콩에서는 본토와 거리를 두려는 시위가 크게 일어나 국제적인 관심을 모았다.

시위 당사자들이 느끼는 ‘민주화’는 홍콩이라는 경계 안에만 집중된 관심일 뿐, 본토의 상황이나 인권과는 무관하다. <과계>가 목숨 걸고 넘으려는 경계를 오히려 더 높고 견고하게 세워야 가능한 요구다.

지금 한국은 저출산이 국가적 차원에서 사회 문제가 되는 시대다. ‘산아제한’이니 ‘가족계획’이니 하는 말이 지난 세기의 문제가 된 상황에서 이 영화가 담아내는 인간관계와 사회문제에 대해 대중적인 공감을 얻기 어렵다보니 여러 영화제에서는 호평을 받아도 개봉은 쉽지 않은 상황일 듯하다.

대신 한국에서는 육아예능 프로그램이 높은 시청률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이런 예능 프로그램들은 그야말로 ‘판타지’다. 한 번도 아니고 매번 돌아오는 주말마다 시간을 온전히 비워 아이와 아빠가 여행을 할 수 있는 형편인 집이 얼마나 있을까도 문제지만, 이 프로그램이 육아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결혼이나 출산이 ‘넘사벽’이 된 상황에서 육아를 대리 체험하는 것이 인기의 주된 요소다.

사실 이런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아빠들조차 처음 시작할 때 이런 계기가 없었다면, 그러니까 돈 받아가며 자기 자식 손수 보살피고 함께 놀러갈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아이와 살가운 관계가 아니었다고 고백하곤 한다.

프로그램 초반의 재미는 자기 분야에서는 꽤 성공해서 입지를 다진 연예인이나 운동선수 같은 명사 아빠 출연자들이 아이와 함께 있는 상황에서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는 ‘허당’과 ‘멘붕’ 상황에서 나온다. 대부분의 시청자들보다 경제적으로 더 여유가 있을 이 성공한 아빠들 역시 아이와 데면데면하게 지내 온 이유는 가족, 특히 자식을 위해 열심히 일만 하고 살아왔기 때문이라고들 답한다.

   

▲ 영화 ‘인터스텔라’ 스틸컷

 

 

남의 집 자식 키우는 모습, 남의 집 아이들 노는 모습에 한 주 동안 쌓인 피로가 날아간다며 ‘엄마 미소’ ‘아빠 미소’ 짓는 시청자들 대부분은 아마 어쩌다 한 번 모처럼 시간을 내서가 아니라면 그렇게 자기 자식에게 집중해서 시간과 여유를 쏟을 기회가 없을 것이다.

청년 세대 시청자가 아이를 낳으려면 연애를 해야 하고, 연애를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돈을 벌려면 취업을 해야 하고...

기혼에 자식이 있는 시청자가 아이랑 시간을 보내려면 일이 없어야 하고, 일이 없으면 돈도 없고, 돈이 없으면 자식을 키울 수 없고...

아이를 낳기 위해 경계를 넘으려는 <과계>와 달리 한국의 아빠들은 아이를 키우기 위해 있는 자식도 경계 너머로 보내야 능력을 인정받는다. 가령 외국에 자식과 아내를 보내놓고 열심히 교육비와 생활비를 벌어서 보내는 기러기 아빠.

<인터스텔라>가 유독 한국에서 흥행이 잘되는 이유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참 많다. 평소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일이 드문 중장년층 남성들이 자식과 함께 이 영화를 보고 왔다는 관람기가 넘쳐 난다. 천체물리학이 어떻고, 상대성 이론이 어떻고, 스크린에 펼쳐진 스펙터클이 어떻고 하는 설명들도 쏟아지고 있다.

   

▲ 영화 ‘인터스텔라’ 스틸컷

 

 

그런저런 설명들도 다 일리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자식을 위해 죽도록' 사는 아버지가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아빠 어디가?>나 <슈퍼맨이 왔다>가 부성을 연성화해 히트 상품으로 만든 트렌드에, 스펙터클까지 장착한 데다, 미래에도 영속될 가부장의 생명력을 탑재했으니 한국 아저씨들이 자긍심과 자기연민에 대한 공감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기 때문 아닐까?

별과 별 사이보다 더 아득한 것이 아빠가 자식과 함께 보내는 ‘시간과 공간’이 된 사회에서 <인터스텔라>는 자식 위해 일만 하는 기러기 아빠의 우주적 버전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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