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그렇습니다. 5·18때 저는 광주 K여고 1학년이었고, 당신은 총칼 든 계엄군이었지요. 그때 저는 당신께 살려 달라고 애원했지만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끝내 당신은 무자비하게, 이렇게 제 젖가슴까지 도려냈지요!”  

할 말을 잃은 김만수는 승복으로 아랫도리만 가리고 앉아 있는 스님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분명 그미의 얼굴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 낯이 익었다.

“하늘이 도왔던지 저는 죽지는 않았습니다. 병원에서 1년 정도 치료를 받고 나서 퇴원했구요. 집에서 요양하다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1982년 봄에 출가했습니다. 그 뒤 지금까지 특별하게 관심을 갖고 공부한 분야가 있는데, 이 책들을 한번 살펴보시죠!”

스님이 내민 책자들은 ‘정감록,’ ‘격암유록’ 등 여러 권의 예언서였다. 

“아니 스님, 이런 예언설 왜 저한테 보여 주시는거죠?”

“당신이 바로 이 세상을 바꿀 소중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무슨 능력으로 이 세상을 바꾼다고 이러십니까? 저는 말이죠, 그럴 자격도 없구요. 그럴 능력도, 용기도 없는 놈입니다!”

“그건 아닙니다. 제가 당신을 처음 만난 것은 1980년 5월 20일이니, 벌써 13년 전의 일이군요. 당신 때문에 제 인생은 완전히 망가졌고, 이렇게 비구니가 됐습니다. 근데 왜 제가 폐허가 된 내원암에 온 줄 아십니까? 그건 저와 당신의 거역할 수 없는 인연 때문입니다. 전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은 전봉준 장군처럼 이 세상을 바꿀 혁명가의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당신이 동학의 성지 부안 백산 출신의 여성과 결혼하고, 오늘 위도활빈당 창립의 주동자가 된 것도 다 그런 운명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더 충격적인 말씀을 한 번 드려볼까요? 사흘 전 서해훼리호가 침몰한 것도 당신에게 주어진 그런 운명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아니 스님, 서해훼리호가 침몰한 것이 제 운명과 어떤 관계가 있다고 이러십니까? 정말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시는 이유가 도대체 뭐죠?”

“이건 억지가 아닙니다. 저는 당신의 능력을 믿습니다. 아니  당신의 양심을 믿습니다. 그래서 제 젖가슴을 대검으로 찔러 이렇게 잘라버린 당신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처음엔 당신을 증오했지요. 전국 방방곡곡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당신을 꼬옥 찾아내 보복하고 싶었고, 실제로 그런 시도도 해봤습니다. 근데 증오가 연민으로 바뀌더군요. 당신도 질곡의 역사 속에서 치유할 수 없는 심신의 상처를 입은, 암울한 시대의 희생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병상련하는 분이라는 생각에 이르다보니 언제부턴가 당신을 향한 저의 증오는 연민으로 바뀌었습니다. 증오가 연민으로, 연민이 사랑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는데요. 사실 저는 오랫동안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당신의 여인이 되기 위해 허물어져 가는 내원암까지 찾아왔습니다. 전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사랑을 고백하던 스님은 한참 동안 흐느끼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국부를 가려주던 승복이 대웅전 바닥에 떨어졌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스님이 한 발 한 발 앞으로 다가오자 김만수는 당황하며 엉덩걸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좁은 대웅전 벽이 그의 엉덩걸음을 가로막았다. 눈 보다 동자가 더 커진 김만수에게 다가선 스님은 무릎을 꿇고 쪼그리고 앉아 두 손을 내밀었다. 그러더니 김만수의 웃옷부터 벗기기 시작했다. 스님은 이내 벌거숭이가 된 김만수의 무릎 위에 엉덩이를 깔고 올라탄 뒤 자신의 여성에 김만수의 남성이 들어오자 욕정에 굶주린 사람처럼 거칠게 숨을 헐떡거리며 몸부림쳤다. 김만수는 스님의 잘려 나간 가슴 흉터를 조심스럽게 만져 보았다. 그런데 왼쪽 가슴의 흉터를 뚫고 구렁이 한 마리가 혀를 날름거리며 기어 나왔다. 

“아아악!…”

잠시 뒤 오른쪽 가슴의 흉터에서도 구렁이 한 마리가 기어 나왔다.

“아아악!…”

스님의 가슴 흉터에서 기어 나온 두 마리의 구렁이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김만수의 두 팔과 목을 칭칭 감았다. 김만수의 무릎 위에 올라 앉아 욕정을 한껏 발산하던 스님의 얼굴이 서서히 여우의 얼굴로 바뀌었다.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여우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입을 쫙 벌리고 김만수의 얼굴을 덮쳤다.    

“안 돼, 아아악!…”

꿈이었다. 그러나 김만수는 벌떡 일어날 수 없었다. 등골이 땀으로 흥건했다. 1980년 5월 이후, 김만수는 이런 악몽을 벌써 13년째 꾸고 있다.   

“아 씨발, 난 언제까지 이런 고통을 겪어야 되는 것이여, 흐으윽!… 어엉어어!…”

김만수가 이렇게 울부짖고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만수형, 왜 그래요, 뭔 일 있어요?”

불안감이 진하게 묻어 있는 박문수의 목소리였다.

“아아 아니다, 흐윽 흐으윽!…”

술 취한 박문수가 수심 가득한 얼굴로 방에 들어왔다. 김만수는 그에게 방금 전에 꾼 악몽을 줄거리만 추려서 들려주었다.

“형, 내일 모레 어머니 삼우젤 지내고 위돌 뜹시다!”

다짜고짜 이렇게 말하는 박문수를 김만수는 충혈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도 출근해야 되구요. 형도 사업 시작한 지 얼마 안됐는데, 여기 더 머물 수가 없는 몸이잖아요.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서울로 올라가자구요!”

김만수는 입 안이 쓴 듯 얼굴을 찡그렸다.    

“형, 자고 있는 두어 시간 동안 희오하고 여러 가지 얘길 나눠 봤는데요. 위도활빈당이고 뭐고 신경 쓰지 마시고 저와 형은 일단 위돌 뜨자구요. 방금 전에 형이 꿈 얘길 들려 줬는데 그 꿈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형은 얼른 위돌 떠야 됩니다. 안그러믄 김두길이 이 새끼들한테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른단 말이에요!…”

박문수가 이렇게 다그치자 김만수는 고개를 숙였다. 그가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울분을 겨우 참아내며 한참 동안 말이 없자 박문수는 조용히 방에서 나갔다. 김만수는 자리에 드러누워 눈을 감고 잠을 청해 보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벌써 한 시간이 지났다. 과음해서 속이 쓰린 탓도 있지만 목숨을 걸고 간간히 날아드는 모기 탓도 컸다.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써도 용하게 달라붙는 모기를 잡기 위해 김만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에 붙어 있는 모기를 어렵게 찾아내 손바닥을 힘껏 내려치기를 열 차례가 넘게 해보았지만 매번 허탕이었다. 그러다 방바닥에 앉아 있는 모기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 모기는 다른 모기들과 달리 김만수가 다가가도 달아나지 않았다. 그 모기를 때려잡은 오른손 바닥엔 검붉은 피가 좁쌀만 하게 묻어 있다.  

“씨발, 얼마나 많은 피를 빨아 먹었길래 이렇게 날아서 도망치지도 못할까 잉!”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김만수의 머릿속엔 잡다한 생각들이 스쳐갔다. 이 모기 몸속에서 나온 피는 어제 오후 작은딴치도 박씨들 문중산에 묻힌 외숙모 고창댁의 피일 수도 있고, 자신의 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새끼들!…”

김만수는 민초들의 고혈을 빨고 있는 이 땅의 금수들이 피를 빨다 죽은 모기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자 이렇게 쌍욕을 뱉어냈다. 금수나 다름없는 사람들이 방금 전 피를 빨다 자신의 손에 잡힌 모기와 다른 점은 뭔지 생각해 보았다. 뚜렷하게 떠오른 것은 강산이 바뀌고, 정권이 바뀌어도 금수들을 확실하게 때려잡은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다. 귀신도 울고 갈 만큼 권모술수에 능하고 나라가 망해도 죽지 않고 살아남을 만큼 질긴 생존력을 자랑하는 금수들은 오늘도 대를 이어 물려받은 부와 하늘을 찌를 듯한 권력을 자손만대 이어가려고 온갖 수작을 다 부리고 있다. 이런 금수들이 득세하고 나라 살림을 떡 주무르듯 하고 있는 금수공화국에서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닫고, 귀를 닫고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자, 김만수의 눈에서는 눈물만 쏟아져 나왔다.      

“만수, 낼 서울로 올라갈꺼냐?”

작은딴치도 박씨네 문중산에서 치러진 고창댁의 삼우제가 끝날 무렵, 외삼촌 박기보가 조카 김만수에게 물었다.

“네, 문수랑 낼 올라갈 생각입니다!”

“그려 잘 생각힜다. 어저끄 내가 면사무소에 너그 숙모 사망 신골 허러 갔다가 사곤일 만났는디, 그저끄 니가 벌금 삼복회집허고 진리 대호 상가집이서 난동을 부렸다고 험서러 니 욕을 바가지로 허던디, 너 여그 위도에 있어봤자 니 신상에 존일 읎을턴께 웬간허믄 낼 서울로 올라가그라 잉!”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떨구는 김만수를 형 김대수가 10m쯤 떨어진 고창댁의 봉분 앞에서 지켜보고 있다. 그 역시 김두길과 김동필 등으로부터 김만수를 잘 단속하라는 충고를 들은 터라 동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여간 곱지 않다. 김만수는 형의 그런 시선을 아랑곳 않고 삼우제에 참가한 친인척 20여 명 중 가장 먼저 하산을 서둘렀다. 

김만수의 상경을 압박하는 건 위도에 사는 혈족만이 아니었다.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아내 송지숙도 얼른 상경하라고 성화가 불같다. 어제 오후 3시쯤 구리시로 전화를 걸어 아내와 통화했다. 저녁 9시쯤엔 아내가 삐삐로 호출해 통화하게 됐는데 하루라도 빨리 상경하라고 김만수를 다그쳤다. 아무래도 외사촌인 박기보의 딸이나 친형수인 김대수의 처 박정자가 그미에게 김만수의 동정을 귀띔한 모양이었다. 

“형, 내일 육지로 나갈꺼죠?”

절름발이 김만수가 작은딴치도 부둣가에 이르렀을 때 부랴부랴 뒤를 밟아 온 박문수가 물었다.

“그려 낼 나가자!…”

김만수가 이렇게 대답하자 박문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형은 어제 늦잠 자는 통에 대호 발인식에 참갈 못했지만 저는 희오랑 참갈했는데요. 오후 늦게 도장금 안골 대호 장지까지 순신이 형님이 찾아 왔습디다. 그래 대홀 땅에 묻고 희오랑 순신이 형님하고 술 한 잔 했는데요. 순신이 형님도 만수 형이 위도에 더 머물면 안 될 것 같다고 걱정을 하던데, 위도활빈당은 순신이 형님허고 희오가 잘 이끌어 보겠다고 했으니 위도 일은 걱정 마시고 우린 낼 서울로 올라갑시다.”

김만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앞서 걸어가면서 바닷물이 빠져나간 치도리와 딴치도리 사이의 드넓은 갯벌을 바라보고 있다.  

“형, 오늘 저는 희오랑 벌금리 윤복이 아저씨네 삼성홀 타고 참사 현장에 나가서 시신 인양 작업을 지켜 볼 생각인데, 형님도 함께 가실꺼요?”

“아니다. 난 내원암 스님 좀 만나 볼란다!”

김만수는 어제 오후 4시쯤 내원암에 전화를 걸었다. 주지 송헌 스님과 오늘 오후 1시30분 내원암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스님을 만나서 뭐 하실려구요?”

“그저께 밤에 내가 꾸었던 꿈 얘길 너한테 들려줬잖어! 그래 스님을 찾아가서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꼬여 있는지 한 번 자문을 구해 볼 참이다!…”

김만수는 약속시간 보다 30분 빨리 지풍금 내원암에 도착했다. 지풍금 마을 뒷산 망금봉 기슭에 자리 잡은 내원암(內院庵)은 선운사(禪雲寺)의 말사다.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위도 불교 신자들이 추정하고 있는 내원암의 창건 연대는 삼국시대다. 그렇게 추정하는 근거는 우선 전북 부안군 내소사(來蘇寺)와 고창군의 선운사, 그리고 전남 영광군의 불갑사(佛甲寺) 등 칠산바다 주변의 고찰들이 대부분 삼국시대에 창건됐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에 있는 고찰인 불갑사의 역사에 큰 관심을 두고 있다. 백제 불교 최초 전래지라는 영광군 법성포 일대는 예로부터 위도인들의 주요 생활권역이었다.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서기 384년인 백제 침류왕 원년에 인도승 마라난타가 중국 동진을 거쳐 칠산바다를 건너와서 불갑사를 개창했다고 한다. 그래서 위도의 불자들은 내원암을 비롯해서 대리의 당집을 포함한 여러 마을의 원당, 상여가의 ‘가남보살’ 등 생활 속에 깊숙이 스며있는 위도의 다양한 불교문화가 불갑사의 창건 시기인 삼국시대부터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해발 240m인 망금봉(望金峰)은 위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다. 해발 254m로 위도 최고봉인 망월봉(望月峰)에도 절이 있었고, 다른 곳에도 절이 있었다고 전해 오지만 현존하는 유일한 사찰인 내원암이 위치한 이곳 망금봉 중턱은 ‘고슴도치섬 위도(蝟島)’의 자궁(子宮) 부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곳에 자리잡은 내원암은 위도인들에게 아들을 낳기 위해 치성을 올리는 득남(得男) 기도처로 각인돼 있다. 절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유서 깊은 암자인 내원암의 대웅전 왼쪽 앞마당엔 수 백 년 된 배롱나무(목백일홍)가 한 그루 서 있다. 그 옆엔 위도 최고의 물맛을 자랑한다는 우물도 있다. 내원암에서 저녁이면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위도인들은 ‘내원모종(內院暮鐘)’이라 부르면서 위도 팔경(八景)의 하나로 꼽아왔다. 이곳 내원암에서 울려 퍼지는 범종소리는 위도인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서 만선을 꿈꾸며 칠산바다로 몰려들었던 고깃배 선원들의 온갖 시름을 덜어 주고 생지옥 같은 세상살이의 고통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게 해주었다.     

“송헌 스님, 안에 계신가요?”

김만수가 대웅전 왼쪽에 있는 스님 거처로 들어가는 부엌문을 두드렸다.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출입문을 열고 20대 후반의 비구니 스님이 나왔다. 

“어서 오시소, 김 사장님!”

송헌 스님은 김만수를 김 사장님이라 불렀다. 올 봄 김만수가 아내 송지숙과 함께 내원암에 들러 건넸던 명함에 ‘온달식품 대표’라는 직함이 찍혀 있다 보니 그렇게 부른 모양이었다.   

“스님, 방바닥이 차갑네요!”

방안에 들어선 김만수가 방바닥을 손으로 만지며 말했다. 

“아직 견딜만 합니더. 근데 우짠 일로 저를 뵙자고 했는가예?”

“어제 전화로 간단히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서해훼리호 참사로 돌아가신 외숙모님 장례식 때문에 위도에 왔다가 내일 육지로 나가야 되는데요. 위돌 떠나기 전에 스님을 꼬옥 좀 찾아뵙고 인생 상담을 할까 해서 왔습니다.”

“제가 김 사장님 인생 상담을 해드릴 만큼 공력이 깊지 않은데예…”

송헌 스님은 공손하게 이렇게 대답한 뒤 찻잔을 준비했다. 그런 스님의 가슴패기를 김만수는 슬쩍 훔쳐보았다. 꿈속에서 봤던 것처럼 스님의 유방이 정말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승복에 가려진 스님의 양쪽 유방은 분명히 제자리에 자리를 잡고 있는 듯 했다. 

“스님, 고향이 광주는 아니죠? 사투리가 경상도 쪽인데...”

“네, 전 대구라예.”

“그럼 고등학굘 대구서 나오셨나요?”

“네, 대구서 고등학교, 대학굘 나왔는데예, 근데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는거지예?”

“그냥 궁금해서요!…”

이렇게 시치미를 떼고 난 김만수는 스님이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차를 끓이고 있는 사이 방안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혹시 꿈속에서 봤던 예언서가 하나라도 방안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예언서는 단 한 권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 넓지 않은 방안에 있는 것이라곤 몇 점의 탱화와 붓, 물감 등 그림을 그리는 도구뿐이었다.  

“스님은 탱화를 공부하시는 모양이죠?”

“네, 탱화를 방편으로 삼아서 제 가슴에 부처님을 모시고 수행하다보니 어쩌다 이곳 내원암까지 오게 됐네예!”

“아차, 올 봄에 제 처와 들렀을 때도 그렇게 말씀하셨던 같은데, 헤헤 까먹어서 죄송합니다… 어쨌거나요, 스님! 제가 서해훼리호 참사를 겪으면서 더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데요, 제 인생은 참 기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 이 험한 세상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지 몰라서 이렇게 염치 불구하고 스님을 찾아왔습니다!…”

송헌 스님은 김만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보통 키에 가녀린 몸매, 백옥의 피부에 짙은 눈썹과 초롱초롱 빛나는 눈, 오똑한 콧날과 도톰한 입술.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송헌 스님의 자태는 30대 중반인 김만수의 혼을 쏘옥 빼버릴 만큼 곱고 아름다웠다.  김만수는 숨겨두었던 인생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다. 장장 두 시간이 넘게 김만수의 얘기를 듣고 난 송헌 스님은 빙그레 눈웃음을 치며 이렇게 말했다.  

“김 사장님은 참 업고가 많으신 분 같은데예 제가 어떤 얘길 해드려야 될지 막막하네예.”

“스님, 당장 먹고 살아야 되니 깊은 산속에 혼자 들어갈 수도 없는 일이구요. 성격은 모가 나서 어디를 가나 부딪치는데다 전직 두민국 대통령과 태민국 대통령의 이름 석자만 들어도 울화통이 터지고 피가 거꾸로 솟는데 대체 이 일을 어쩌면 좋겠습니까?”

“제 생각에는예 그 분들과 악연의 고리를 끊는 것이 당장 필요해 보이는데예 혹시 유감주술이라고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네예?”

“유감주술이요?…”

“대리 띠뱃놀이 행사 때 허수아비 못봤어예? 바다로 떠나는 띠배에 싣기도 하고, 마을 구석구석에 세워 두기도 하는, 짚으로 만든 작은 인형 말이라예!”

“네, 그걸 제웅이라고 하지 않나요?”

“맞습니더. 고걸 제웅이라고도 하는데 예로부터 그 제웅은 여러 용도로 쓰였는데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의 옷을 입히고 그 안에 사주를 적어 넣고 바늘이나 송곳 같은 걸로 찌르면서 저줄 하잖습니꺼!…”

송헌 스님의 얘기를 듣고 난 김만수의 머릿속엔 사극에서 많이 보았던 제웅을 이용한 저주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저주하고 싶은 대상을 찾아보니 우선 자신의 인생을 처참하게 망가뜨린 전직 대통령 두 명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두 사람 외에도 여러 사람 얼굴이 머릿속을 스친다. 이윽고 서해훼리호 참사를 불러 온 썩어빠진 권귀들을 모조리 저주해야 되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제웅을 이용한 유감주술은 어제 위도활빈당 창립 과정에서 거론되었던 대한민국의 권귀 7백명을 타도하는데도 적잖은 도움을 줄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스님, 제가 저주하고 싶은 사람이 수 백 명인데, 제웅이 하나에 그 사람들 모두의 사주팔자를 종이에 적어서 집어넣고 저주해도 효과가 있겠습니까?”

송헌 스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해도 무방할 것 같은데예 김 사장님이 그런 식으로 저  주하고 싶은 분이 몇 분이나 되는데예?”

“일단 7백 명입니다. 전‧현직 대통령, 국회의원, 재벌, 관피아, 언론사 기레기, 그리고 종교인… 이 나라를 망가뜨리는 금수들한테 저주의 주문을 걸어 보고 싶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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