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처음 들어본 병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의사는 천천히 말했다. 피부 T세포 림프종 입니다. 의사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것인지 아직은 추정일 뿐이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물었다. 이게 피부암입니까? 의사는 넓게 보면 그렇다고 했다. 아, 내가 암에 걸린건가.” 

이민국(50.가명)씨는 여러 번 사업에 실패했다. 피자, 치킨, 독서실…사업에 실패했다고 일을 안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당시 늦둥이 막내는 초등학교에도 입학하지 않았다. 그러다 2011년 11월 아르바이트 사이트에서 삼성반도체 화성사업장 하청업체 한양CMS의 구인글을 보게 됐다. 이씨는 무엇보다 지원가능 나이가 마음에 들었다.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그러나 이씨는 1년 3개월만인 2013년 1월, 회사를 그만두어야 했다. 사타구니가 가려워 찾은 피부과에서는 사타구니는 쳐다보지도 않고 등에 있는 반점만 봤다. 이씨는 그때까지 등에 반점이 있는지도 몰랐다. 의사는 ‘피부T세포 림프종’이라고 말했다. 이는 림프종(임파선암)의 일종으로 면역체계에 발생하는 피부암이다. 이씨는 지난 달 28일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 전자산업 피해 노동자들과 반올림이 지난 달 28일 근로복지공단에 집단 산재 신청을 했다. 사진=반올림 제공
 

“삼성반도체, 제일 밑바닥에서 일 했어요”

“제가 일하던 곳은 제일 아래였어요. 피라미드로 보면 제일 밑바닥.” 이씨는 자신이 하던 업무를 그렇게 표현했다. 이씨는 협력업체 소속으로 삼성반도체 화상공장 15라인·16라인 CCSS룸에서 일했다. CCSS는 화학물질 중앙 공급 시스템(central chemical supply system)의 준말로 각종 화학물질이 이 CCSS룸에서 반도체 생산라인에 공급된다.

‘밑바닥’ 이라는 표현처럼 업무는 위험하고 단순했다. CCSS룸의 위치부터 그랬다. CCSS룸은 반도체 생산라인과 분리돼 있었다. “우리가 일하는 곳은 출입구에 ‘적색지역’ 이라는 경고문이 있어요. 출근 첫 날 그 문구를 보고 위험하다는 걸 알았어요. 삼성 사람들은 거기로 안 오죠.” 2013년 삼성반도체 화성공장 두 차례 불산사고가 일어난 곳도 바로 CCSS룸이었다. 

‘적색지역’으로 분류된 곳에서 이씨는 화학물질이 든 드럼통을 다루었다. 업무는 크게 화학물질 입고(delivery)와 충전(charge)으로 나뉘었다. 드럼통이 도착하면 이를 창고로 옮기는 일이 ‘입고’이며 창고에서 드럼통을 꺼내 공급탱크와 연결하는 일이 ‘충전’이다. 공급탱크와 연결된 화학물질은 관을 타고 7층에 위치한 반도체 생산라인으로 공급됐다.

그는 업무 중 화학물질에 직접 노출되기도 했다. ‘충전’하기 위해서는 드럼통 뚜껑을 열어야만 했다. 공급탱크 관이 고장 나면 드럼통 위에 화학물질이 떨어지면 직접 닦았고 공급호스가 드럼통 안으로 들어가면 손으로 호스를 빼냈다고 이씨는 증언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다룬 화학물질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 한다. 아무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어떻게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려주지 않고 그냥 장갑이랑 마스크를 끼라고 했어요. 그게 우리가 받은 교육의 전부예요. 공급탱크가 있는 설비마다 물질안전보건자료(MSDS, Material Safety Data Sheet)가 붙어있었는데 거기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제대로 본 적은 없어요. 일하기 바쁜데 볼 시간이 어디 있나요. 누가 보라고 말도 안 했고요.” 

   
▲ 삼성반도체 화성공장 협력업체 노동자로 일했던 이민국(50.가명)씨를 지난 17일 수원에서 만났다. 사진=이하늬 기자
 

“원료창고에 가면 바지 끝단이 닳았어요”

다만 이씨는 업무용 이름은 조금씩 기억했다. ‘랄500(LAL-500)’ ‘티(WLC-T)’등이다. 이씨의 말에 따르면 그가 다루었던 화학물질은 크게 산, 알칼리, 솔벤트(유기용제)로 분류할 수 있다. 그는 산 중에서는 LAL-500·질산·WLC-T·왕수·황산구리 등을 솔벤트 중에서는 시너·초산 등을 기억했다. 정확한 정보는 산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추가로 밝혀져야 한다. 

그의 기억이 정확하다는 가정 하에 물질안전보건자료에 나온 해당 물질의 유해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급성독성·피부부식성 및 피부자극성·심한 눈 손상 및 눈 자극성·생식세포 변이원성·호흡기 과민성·특정표적장기독성·흡인 유해성. 그는 LAL-500의 경우 드럼통에 쓰인 성분 중 불산도 있었다고 기억했다. 불산은 반도체 식각공정에 사용되는 대표적인 독성 물질이다. 백혈병 산재를 인정받은 고 황유미씨가 했던 작업이 바로 식각공정이다. 

굳이 이런 사실을 몰라도 위험을 보여주는 증거는 많았다. “화학물질 드럼통을 보관하는 창고에 가면 바닥 색깔이 푸르스름하게 변한 곳이 있었어요. 바닥이 움푹 파인 곳도 있었고요. 화학물질이 독해서 그런 거 같아요. 심하게는 바지 밑단이 닳아요. 제가 거기서 일할 때 집 사람이 ‘왜 이렇게 바지가 닳냐’고 하더라고요.” 특히 솔벤트 창고에는 ‘발암물질 주의’라는 표시가 있었다고도 기억했다. 

위험을 몸으로 겪기도 했다. “시너(솔벤트의 일종)를 충전해야 하는데 공급탱크의 연결 부위(커플러)가 깨져서 시너가 드럼통 위로 흘렀어요. 장갑을 낀 채로 닦았죠. 마스크를 꼈는데도 냄새가 확 올라오더라고요.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다리가 후들거렸어요. 사람이 쓰러질 정도의 냄새라는 건 맡아보지 않으면 모를거예요.” 

사고 이후 그는 15라인 CCSS룸으로 이동을 요청했다. 16라인에 비해 15라인은 그나마 ‘무해’하다고 생각했다. 15라인으로 옮긴 다음 그는 회사에 오래 다녀야겠다고 다짐했다. “위험하지만 이 나이에 갈 데가 없잖아요.” 하지만 4개월 뒤, 이씨는 피부T세포 림프종을 진단받았다. 일종의 피부암이다. 

   
▲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 지난 3월 서울 곳곳에서 전자산업 피해자 추모주간 행사를 하고 있다. 사진=반올림 제공
 

“위험하니까 삼성 직원들은 안 하겠죠”

암은 발생한 부위와 발생한 세포, 두 가지 기준으로 나눌 수 있다. 이씨의 경우 피부에 암이 발생했지만 암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는 림프구다. 즉 림프종(임파선암)이 피부에 발병한 셈이다. 반올림에 접수된 피부암 전자산업 피해자는 이씨의 경우가 유일하다. 하지만 림프종으로 산재를 신청한 사례는 많다. 송창호씨와 고 박효순씨 등이다. 

이는 자료로도 증명된다. 2008년 산보연이 전체 반도체 종사자 22만9683명을 대상으로 역학조사를 벌인 결과 악성 림프종(비호지킨림프종)은 일반인에 비해 유의미한 통계가 나왔다. 보고서에 따르면 반도체 여성 노동자는 일반인에 비해 2.67배 높게 나왔으며 특히 조립 공정 생산직의 경우 발병률이 5.16배나 높게 나왔다. 이종란 노무사는 “꼭 성별에 국한해서 볼 필요는 없다”며 “발병 확률이 높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이씨는 자신이 다루었던 물질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과정부터 필요하다. 역학조사가 시작되면 산보연은 삼성반도체 화성공장에 이씨가 사용했던 화학물질에 대한 자료를 요청할 것이다. 문제는 영업비밀 등의 이유로 회사가 공개하지 않을 가능성이다. 이럴 경우 노동자는 알 길이 없다. 하청노동자의 경우 이는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노동자에게 업무와 질병의 인과관계를 입증하도록 하는 산재 제도의 구멍이다. 

그럼에도 이씨는 나름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제가 증명을 못 해서 산재를 인정 못 받을 수는 있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반도체 공장 때문인 거 같아요. 단순노동이긴 하지만 이렇게 위험한 일이니까 삼성 직원들은 직접 안 하겠죠. 나이든 사람을 쓴 이유도 그런 거 같아요. 어렵고 위험해도 못 그만두니까요.” 지난해 발생한 화성공장 불산 누출 사고에서 숨진 노동자도 하청업체 소속이었다. 

“저는 삼성이 공장 문 닫아야 한다 그런 게 아니에요. 저는 굉장히 열심히 일했고 그런데 얻은 게 암이에요. 하청업체 일이라고 미룰 게 아니라 이 업무가 없으면 반도체 공장이 안 돌아가거든요. 삼성이 책임을 져야죠. 아픈 사람이 저 말고도 많잖아요.” 현재까지 반올림과 함께 산재를 신청한 피해자는 총 62명이다. 이 중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를 인정받은 피해자가 3명, 법원에서 인정받은 피해자가 5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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