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창간 94년을 맞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전체 지면을 분석한 책이 각각 5권으로 출간됐습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일제강점기, 4·19혁명부터 1987년 민주화운동까지,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주요 사건을 어떻게 기록했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에 각 책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새로운 권력이 들어설 때마다 권력을 찬양하던 조선일보 역사는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때도 이어졌다. 이승만을 지지하던 조선일보는 그를 무너뜨린 4·19혁명이 일어나자 혁명을 지지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키자 태도를 바꾸었다. 

1961년 5월16일 0시 15분경 육군소장 박정희 일행이 서울 영등포 문래동의 6관구사령부에 도착하면서 쿠데타가 시작됐다. 해병여단 1개 대대, 포병단, 공수단이 서울시내를 점령했다. 

조선일보는 이 사건을 처음에는 ‘쿠데타’라고 명명했다가 이틀 뒤인 18일에는 사설 <혁명에 바치는 찬사>를 싣는다. “우리는 세 가지 점에서 그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첫째는 군사혁명이 무혈혁명의 전격적이었다는 것이요, 둘째로는 군사혁명위원회가 발표한 혁명공약에서 발견할 수 있고, 셋째로는 국내외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중앙정보부가 개입된 증권파동, 워커힐사건, 새나라자동차사건, 빠찡꼬사건 등 4대 의혹 사건에 대해서도 침묵했다. 조선일보는 중정 간부들이 법원이나 군법회의에 재판을 받는 일에 대해 보도하지 않았다. 

1966년 10월 박정희가 광화문에 탱크를 동원해 비상계엄령을 내린 후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을 중지시키는 헌정쿠데타 ‘유신’을 선포했을 때도 찬양했다. 조선일보는 사설 <평화통일을 위한 신체제>에서 “오늘 우리에게 부닥친 안팎의 모든 정세를 살펴보며 조국의 앞날의 걸어가는 길을 내다볼 때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알맞은 조치로서 이를 환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 5.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맨 왼쪽).
 

이 시기의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이유는 단순히 박정희를 찬양하고 독재·유신을 미화해서가 아니다. 박정희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고한 사람을 납치하고 사법살인을 저지르는 만행을 저지를 때 진실을 보도하지 않으며 침묵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쿠데타 이틀 후인 5월18일 전국의 매체 912개 중 82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폐쇄하는 언론탄압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날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와 논설위원 송지영 등 간부 10명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으로부터 자금을 들어와 사회주의 세력을 규합하는데 일조했다는 혐의로 구속했다. 박정희는 12월21일 오전 조용수에 대한 사형 집행을 확인하고 사형선고를 받은 송지영 등에 대해서는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사형집행은 그날 오후 바로 이뤄졌다. 

조용수 사장 구속부터 “군사정권의 ‘앵무새’ 구실을 충실히 했던” 조선일보는 사형이 집행되자 <혁명재판 판결의 확인과 집행의 교훈>에서 오히려 박정희를 찬양했다. 

“5명의 사형수에게 사일등을 감한 박 의장(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관대한 처분은 그들의 가족·친지에게는 물론 개인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반인에게도 가슴 흐뭇한 느낌을 주었으며 숙연한 혁명과업 완수 과정에 최고 통치 당국의 온정이 그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1973년 일본과의 외교문제로도 비화된 김대중 납치사건에서도 조선일보는 대체로 침묵을 지켰다. 이 사건은 유신독재 시절 박정희의 지시에 의해 이후락이 이끄는 중앙정보부 공작원들에 의해 살해를 목적으로 납치한 정치테러사건이다. 

박정희의 최대 정적인 김대중이 실종됐지만 조선일보는 1면 2단짜리 기사에서 “한국말을 사용하는 5명의 남자들에 의해 사라졌다”고 전할 뿐이었다. <조선일보 대해부>(3권)는 조선일보가 납치 사건 당시 쓴 기사 제목을 인용하며 “위 기사들의 공통된 특징은 제목의 활자가 아주 작고 내용을 좁은 지면에 빡빡하게 채워 독자의 눈에 잘 뜨이지 않도록 했다”고 전했다. 

조선일보에 김대중 납치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사설이 실린 적도 한 차례 있었다. 조선일보 9월7일 2면 통단 사설 <당국에 바라는 우리의 충정/결단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요즘 우리의 심정은 알고 싶은 것이 있는데 알 수가 없고,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몹시 우울하고 답답하다”란 문장으로 시작한다. 

   
▲ 중앙정보부가 계획한 납치사건 당시 김대중.
 

하지만 이는 조선일보 입장이 아니라 일종의 ‘해프닝’에 의한 사건이었다. <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는 “주필 선우휘가 김대중 남치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한 최고위층의 결단을 촉구하는 사설을 써서 발행인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한밤에 집어넣는 일이 발생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박정희는 1974년 유신 말기 급기야 민청학련 및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조작한다. 대학생들이 유신독재에 맞서 저항을 시작하자 4월3일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며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에 대한 수사를 진행했다. 유신정권은 “민청학련이 북한 공산집단의 이른바 인민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통일전선의 초기 단계적 지하조직으로 이 단체가 반국가적 불순세력의 배후 조종 아래 우리 정부를 전복하려는 국가변란의 음로를 꾸며 학원의 일각에 침투하기 시작했다”는 혐의를 씌웠다. 

조선일보는 이날 <불순세력에서 학원·사회 보호/긴급조치 4호 선포의 배경과 목적>이란 기사에서 정부 발표를 그대로 받아 썼다. 조선일보는 민청학련을 ‘반정부집단’으로 매도했다.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공산계열의 불순세력이 우리 학원에 침투해…우리 학원의 불행임에 틀림없다”고 했다.   

   
▲ 인혁당재건위 조작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이들
 

중앙정보부는 4월25일 민청학련의 배후가 조총련과 인혁당(인민혁명당) 재건위라는 수사 결과를 추가로 발표했다. 민청학련이 인혁당 세력, 조총련, 용공불순세력, 반정부적 인사, 기독교인 등과 함께 반정부연합전선을 형성해 전국에 유혈 폭력혁명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종교계는 목요기도회, 인권회복기도회 등을 통해 구속자 석방을 촉구했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이를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7월11일 사법부는 민청학련 및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대해 판결했다. 관련자 23명 가운데 서도원, 김용원, 이수병,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하대완, 도예종 등 8명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다. 무기징역이 7명, 징역 20년이 12명, 징역 15년이 6명이었다. 이들은 항소했으나 기각됐다. 이들이 사형선고를 받기까지 한 최후진술은 물론 변호인의 변론 내용은 일절 조선일보에 보도되지 않았다.

1975년 4월8일 대법원은 7명의 사형을 확정했다. 그리고 하루 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유신정권은 이들의 시신마저 유족들에게 인도하지 않고 화장해 어딘가에 뿌렸다.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고 선포했고 2005년 국가정보원 과거사위원회는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 한겨레 2007년 1월24일자 기사
 

조선일보는 이 소식을 어떻게 전했을까. 4월 11일 “도예종은 조국이 공산주의 아래 통일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겼고, 다른 7명도 자신의 사상적 신념과 연관된” 유언을 남겼다고 ‘비상군법회의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지만 이 내용은 사실무근의 ‘작문’으로 판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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