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이전에 21세기는 세상의 종말로 예언되던 시기이기도 하고, 무시무시한 묵시록적 재앙을 겪어낸 후에 새로운 천년 왕국이 도래 하리라던 시기이기도 하고, 과학 기술의 무한한 진보로 인류가 우주 식민의 시대를 열게 되리라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컴퓨터로 원고를 쓰는 것이 일반화된 세상에서 밀레니엄 버그가 몰고 올 문명의 혼란에 대해 전 지구적으로 우왕좌왕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1968년에 제작된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경험 불가능한 미래를 상징하는 시간대에 대한 상상이라고 여겨졌다.

그런데 21세기가 되었고, 밀레니엄 버그는 수정 가능한 프로그램 상의 코드 문제였고, 우주 식민에 대한 탐사는 계속 되지만 아직 인류가 살만한 별은 찾지 못했고, 지구 곳곳을 온통 천재지변으로 몰아가고 있는 인간 과학 문명의 식민지는 아직 지구별 하나뿐이다.

영화는 진작부터 SF라는 장르 속에서 인류의 미래를 그려왔다. 그 한 갈래는 외계와의 조우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한 갈래는 문명이라는 편도 열차에 올라탄 인류의 미래가 어떠한 모습일 것인가에 대한 상상의 현실화였다. 이들 두 갈래는 때로는 각각 한 가닥의 이야기를 펼쳐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여러 갈래가 하나로 꼬이기도 하면서 지금까지의 역사 속에서 드러난 희망 또는 불안의 징후들을 미래의 모습을 빌어 투영해왔다.

   

▲ 영화 ‘인터스텔라’ 스틸컷

 

그 양상이 어떤 것이든 간에 영화가 그려내는 미래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다. 미셸 푸코(M. Foucut)의 표현을 빌자면 '동일자'의 역사의 연장선상에 있는 '동일자'의 미래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양한 영역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인식을 특정한 형태로 질서잡고 당대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동일한 형태'의 방향성을 부여하는 보편적인 표상체계로서의 '에피스테메' 가 미래에 대한 영화에도 고스란히 스며들어 작용하는 것이다.

과학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날로 촘촘히 짜여가는 정보화의 그물로부터 미래에 대한 전망도 자유롭지 않다. 이런 시대의 징후는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 이래 유토피아로서가 아니라 디스토피아로서의 미래로 그려지곤 했으며 영화 또한 암울한 미래상을 제시하는데 인색하지 않다.

미래 사회에 대한 대개의 영화는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볼 수 있듯이 지금껏 우리가 무수히 접해 온 신화나 설화의 서사구조 속에 아직까지는 실현되지 않은 테크놀로지의 세계를 놀라운 특수효과를 빌어 변주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 영화 ‘인터스텔라’ 스틸컷

 

<로드 워리어>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좀 다르다. 영화 속의 미래는 오로지 특수 효과로만 존재할 뿐 아직까지는 실현 불가능한 테크놀로지의 세계가 아니라 이미 우리의 지난 문명 속에서 만들어졌으며 이제 어느 정도 낡은 것이 되어버린 조야한 고철덩어리의 세계이다. 휴머니티에 대한 회의, 파시즘화 되어가는 대중문화, ‘속도’의 이름으로 소비되는 현재의 문명을 황량한 원시적 풍경 속에 옮겨놓음으로써 정신이 상실된 현재를 가장 물질적이고 직접접인 폭력의 난무를 통해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블레이드 런너> 또한 아주 낯익은 대도시 뒷골목의 풍경 속에 기존의 서사물들에서 무수히 되풀이되던 인조인간 이야기를 끌어들여 기억을 지배하는 권력에 의해 자기정체성을 확신할 수 없는 미래사회를 만들어냄으로써 실존적 회의의 문제를 제기한다. 자본의 지배 속에서 날로 물신화되고 관료화되어 가는 세계,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 정보화의 그물 속에 소멸되어 가는 개인의 정체성 등 우리 시대가 품고 있는 위기의 징후들을 고발하기 위해 <블레이드 런너>에서는 아주 익숙한 SF의 장치들을 빌어 가상현실로서의 미래를 만들어낸 것이다.

<인터스텔라> 또한 다르지 않다. 과학 문명의 발달은 이제 아버지가 딸을 위해 옥수수를 거두어 먹이는 것조차 불가능해진 지구에서 근대 이후 지배 가능하다고 믿어 온 담론들에 대한 의심을 이야기한다. 근대 이후, 인간은 과학의 힘으로 시간과 공간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가령, 서울에서 더 가까운 곳은 진도 팽목항이 아니라 제주공항이다. 진도는 기차나 버스를 타고 적어도 서너 시간 이상을 가야 닿지만, 제주는 비행기를 타면 50분이면 도착한다.

   

▲ 영화 ‘인터스텔라’ 스틸컷

 

<인터스텔라>는 인간의 문명을 가능하게 했던 농경이 불가능해진 지구에서 다시 농경을 통해 생존이라도 지속하려는 안간힘을 가장 근대적인 방식인 시공간의 압축을 통해 이루고자 한다. 지금보다 더 새롭고 더 근사한 무언가에 대한 꿈 때문이 아니라 예전처럼만 살 수 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을 싣고서 그냥은 넘을 수 없는 물리적 시공간의 한계를 테크놀로지의 힘을 빌려 돌파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렇게 넘어가서 도달하는 곳은 <혹성탈출>이 그랬듯이 돌고 돌아 지구, <콘택트>가 그랬듯이 지구에 나고 죽었던 수많은 인류 가운데서도 자신의 가족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시공간을 넘어선 어드벤처를 통해 <그래비티>가 그랬듯이 자기 자신과 마주 선다.

<인터스텔라> 또한 오랜 SF의 계보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우주여행이 결국 인간의 자아 성찰을 위한 도전이라는 것을 깨닫기 위한 모험이었듯이. 그 모험에서 깨닫는 것은 식민 가능한 또 다른 행성이 아니라 이토록 황폐해진 지구에 대한 책임이다. <인터스텔라>는 이 거대한 우주 별과 별 사이에서 가장 먼 곳이 바로 지구이고, 가장 위험한 생명체가 인류이며, 가장 안타까운 관계가 가족이고, 가장 모르겠는 존재가 자기 자신이라는 영상 에세이다.

   

▲ 영화 ‘인터스텔라’ 스틸컷

 

다시 푸코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기존의 담론을 전복하고 그것에 의해 은폐되고 억압된 것을 드러내면서 그것이 강제하는 실천을 넘어서려는 비판적 문제설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들은 그 결말이 확실할 수 없는 열린 구조로 끝날 수밖에 없으며 그 이후의 고민은 오직 관객의 몫일 따름이다. 실천할 것인가, 소비할 것인가? 물론 영화를 오락적 대상으로 즐기고자 한다면 단지 그 스펙터클에 감탄하고, 테크놀로지가 발달할수록 더 놀라워지는 볼거리가 장착된 속편을 기다리게 하는 장치가 될 수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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