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민주주의는 한때 개량주의 취급을 받았다. 물론 지금도 달라진 건 없지만 몇 년 전부터 복지국가가 화두로 떠오르면서 사민주의도 덩달아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전투적 사민주의’를 주장하는 정승일 사민저널 편집위원장은 이 논쟁에서도 유독 튄다. 정 위원장은 “한국 사회에서는 사민주의가 사회적 합의주의로 희화화되고 진보적 자유주의로 변질됐다”면서 “악질적 신자유주의에 전투적으로 맞서는 진짜 사민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가 최근 한겨레에 쓴 “나는 왜 사민주의자가 아닌가”라는 칼럼에서 “이미 깨져버린 사민주의 꿈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자본에 대한 공세를 기축으로 하여 사회의 모든 약자를 총집결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한 것과 관련 정 위원장은 레디앙에 쓴 “전투적 사민주의를 위하여”라는 반박 글에서 “박 교수는 사민주의에 제3의 길 노선만 있는 것으로 착각하며 비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 위원장은 “사민주의가 신자유주의에 맞서 싸우기는커녕 신자유주의에 포획되어 있다는 박 교수의 비판은 상당 부분 인정될 수 있다”면서도 “박 교수의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에 포획되어 있는 것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진보적 자유주의라는 사실을 간과했다”고 반박했다. “유럽에서는 사민주의가 신자유주의와 타협하는 사회적 합의를 주도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역할을 수행한 것이 바로 진보적 자유주의였다”는 설명이다.

   
정승일 사민저널 편집위원장. KBS 뉴스화면 캡춰.
 

정 위원장은 한때 장하준 영국 캐임브리지대 교수와 함께 사회적 대타협 논쟁을 주도했던 사람이다. 스웨덴 모델을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일가의 경영권 세습을 인정해 주는 대신 고용과 투자 등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빅딜을 하자는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그랬던 사람이 사회적 합의를 타협이라고 비판한다? 궁금증을 풀기 위해 지난 14일 불광동 민주노총 서울지부에서 정 위원장을 만났다.

정 위원장은 “사민주의는 소유권을 인정하되 소득과 투자를 사회화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설명했다. 스웨덴의 경우 발렌베리 일가에 황금주를 허용하고 금융지주회사의 제조업 계열사 지배를 허용하지만 이익의 대부분을 세금으로 가져가고 순이익의 상당 부분을 강제로  적립하도록 했다. 투자 역시 철저하게 정부가 통제한다. 소유권을 사회화하는 사회주의와는 다르다. 오히려 투자의 사회화라는 측면에서 박정희 개발독재 시절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정 위원장은 “증세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다”면서 “투자가 돼야 법인 소득이 늘어나고 일자리가 늘어나고 개인 소득이 늘어나고 소비가 늘고 부가가치세가 늘어나는 선순환이 이뤄질 텐데 복지국가 하겠다는 사람들이 투자와 완전고용에 대한 대안이  없다”고 지적했다. 정 위원장은 “자유주의 학자들이 말하는 소득 주도형 성장도 좋은데 그건 1980년대에나 가능했던 이야기”라고 비판했다.

정 위원장은 “진보진영에서도 부자 증세를 구호처럼 외치는데 부자증세를 이야기하면서 착취와 불로소득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결국 자유주의 논리로 흐르게 된다”고 지적했다. “영국도 노동당이 한때 최대 89%까지 소득세를 부과했는데 그 근간에는 모든 소득은 땀과 노력을 얻어야 하고,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보다 10배, 100배씩 가져간다면 그건 다른 누군가의 땀과 노력의 대가를 가져간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는 설명이다.

정 위원장은 “이건희 회장이 연간 2000억원 이상을 벌어서 세금을 35% 내는데 이걸 50%, 70%로 올리려면 단순히 많이 버니까 많이 내야 한다는 논리로는 부족하다”면서 “그런 건 조세 전문가들끼리나 통하는 동어반복적 논리고 동네 할아버지에게 물어봐도 70%까지 뺏어가는 건 너무 많지 않느냐고 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 할아버지들을 설득하지 않는 이상 복지국가는 불가능하거나 요원하다는 이야기다.

정 위원장은 “자유주의자들은 1차 소득 분배만 잘 하면 복지국가는 조금만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면서 “재벌 개혁을 잘 하고 동반성장 정책을 잘 펼치면 부당이득을 최소화하고 분배 균형을 이룰 수 있다는 논리인데 이게 바로 자유주의적 불로소득론”이라고 설명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 등이 주도하는 재벌개혁 논쟁의 이면에는 완전경쟁 시장을 만들면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이 깔려 있다는 이야기다.

정 위원장은 “거시경제적으로 1차 소득 분배를 높이려면 재벌개혁이 아니라 계급투쟁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계급투쟁을 외면하고 재벌개혁만 외치는 자유주의자들이 복지국가를 가로막고 있다는 이야기다. 정 위원장에 따르면 사회적 대타협 논쟁 역시 잘못 이해되고 있다. 재벌 그룹과 재벌 총수 일가를 구분하지 않고 이건희 지배구조를 용인하자는 의미로 왜곡되고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는 이야기다.

정 위원장은 “사회적 대타협 논쟁은 자본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통제할 것이냐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는데 통제는 빠지고 타협만 남아서 어떻게 이재용 세습을 용인할 수 있느냐고 비판하는 상황”이라면서 “재벌 총수의 소유권을 인정하되 재벌의 소득과 투자를 사회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면 굳이 재벌 체제를 깰 필요가 없다는 문제의식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강조했다.

이런 맥락에서 “사민주의적 계급 대타협은 불가능하다”면서 “자본에 대한 공세를 기축으로 하여 이 사회의 모든 약자들을 총집결하는 매우 급진적인 투쟁이 필요하다”는 박 교수의 주장과 “제3의 길 사민주의로는 신자유주의에 전투적으로 맞설 수 없다”는 정 위원장의 문제의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정 위원장은 “진보적 자유주의의 아류로 전락한 (가짜) 사민주의와 결별하고 신자유주의에 정면으로 맞서는 전투적 사민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정 위원장은 “복지국가를 정치경제학적 접근 없이 단순히 분배적 차원에서만 접근하면 영원히 구호로 남을 수밖에 없다”면서 “이건희 회장에게 10배, 20배, 불로소득의 90%까지 세금를 거둘 수 있어야 그때 비로소 복지국가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정 위원장은 “실패한 개혁적 자유주의의 대안으로 전투적 사민주의를 내세워야 공허한 복지국가 담론을 넘어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정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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