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영화제에서 급하게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일을 하게 되었을 때, 마침 부지영 감독이 <카트>를 제작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 영화제는 여성 영화인이 만든 영화, 그 중에서도 여성적 시선으로 카메라를 겨누는 영화, 그런 영화들을 통해 세상이 좀 더 나아지도록 만들 수 있는 영화들을 위한 자리였고, <카트>는 그런 조건에 더할 나위 없이 딱 맞는 영화였다.

부지영 감독은 이미 2011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단편제작지원 프로젝트인 ‘숏숏숏’을 통해 옴니버스로 제작된 <애정만세> 가운데 한 편인 <산정호수의 맛>(2011년)을 통해 마트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 순임을 스크린에 주인공으로 세웠더랬다.

춥고 시린 밸런타인데이에 외롭고 고단한 40대 마트 노동자인 주인공이 초콜릿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은 짝사랑하던 이와 야간근무를 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초콜릿에 마음 담아 건넬 상대와 달콤한 순간을 맛보고 말캉한 온기를 나누는 대신, 홀로 산정호수를 찾아 간다. 사위가 얼어붙은 외진 그 산정호수 눈밭에 누워 얼음을 깨고 스스로를 녹이는 주인공은 사춘기 딸의 엄마이고, 그 딸과 살아가기 위해 마트에서 일하는 노동자이고, 누군가의 따스한 한 마디에 고단한 일터의 현실을 설레는 마음으로 감당하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 설렘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사랑을 꿈꾸는 것이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은 서럽고 시리다. 순임은 그 차갑고 메마른 현실에서 고꾸라지지도 도망가지도 않고 살아내기 위해 산정호수를 찾아간다. 거기서 넘어지고, 거기서 돌로 꽁꽁 얼은 세상을 깨고, 거기서 꿈과 착각을 보낸다. 홀로 서기 위해.

<산정호수의 맛>에서 순임은 철저하게 혼자였다. 그래서 착각하고, 포기하고, 탈탈 털어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순임이 여럿이라면? 착각은 바로 잡고, 포기하는 대신 격려하고, 탈탈 털어 비우는 대신 채워갈 수 있지 않을까?

<카트>는 충분히 그런 기대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영화였다. <코르셋>(1996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7년) 등 꾸준히 비주류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스크린에 불러 내온 여성제작자 심재명 대표는 이미 2007년 이랜드 홈에버 사건이 불거지던 시기에 이 영화를 기획하고 프로듀서와 감독을 찾았다.

   
▲ 영화 ‘카트’ 포스터
 

2년 이상 근무해온 상시고용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하는 비정규직보호법 시행을 앞두고 있던 당시, 홈에버는 일방적으로 비정규직 계산원을 포함해 계열사 노동자 700여 명을 계약기간도 채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외주용역으로 전환하겠다며 해고를 통보했다. 이런 회사 측의 꼼수에 맞선 해고노동자들이 상암동 홈에버 월드컵점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고 이후 비정규직 노동문제를 대표하는 기나긴 싸움이 되었다.

그 긴 싸움이 지속되는 동안, 심재명 대표는 영화를 기획하고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년), <건축학개론>(2012년)에서 함께 호흡을 맞춰온 김균희 프로듀서에게 현장을, 부지영 감독에게 연출을 맡겨 <카트>를 제작해냈다. 그동안 비정규직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흔하고 보편적인 노동현실이 되었다.

비정규직보호법이 시행된 지 7년 째인 지금,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4년 8월로 비정규직 노동자는 600만 이상, 통계에 잡히지 않는 숫자까지 어름하면 820만 이상이다. 전체 노동자의 44.7%가 비정규직인데, 그 중 여성 비정규직이 443만명, 여성노동자 가운데 둘에 하나는 비정규직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 영화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영화인들 가운데 경험과 실력을 두루 갖춘 제작자, 프로듀서, 감독까지 모두 여성이 바탕을 다지고, 김영애, 염정아를 비롯해 연기력과 흥행성을 아우르는 다양한 여성 연기자들이 중심을 잡고, 중견 연기자 김강우에 인기 아이돌 댄스그룹 EXO 멤버 도경수(디오)가 균형을 이루는 캐스팅으로 제작되는 <카트>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을 비주류 언더그라운드가 아닌 주류 상업영화계에서 대중을 향해 제대로 펼쳐 보일 믿을만한 조합이었다.

   
▲ 영화 ‘카트’ 스틸컷
 

그러나 아쉽게도 봄에 열리는 영화제에서 <카트>는 완성 전이었고, 여성이 중심이 된 영화제에 초청하려는 기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막상 <카트>가 완성될 무렵, 올해의 행사를 마친 그 영화제는 ‘경영난’과 ‘자금난’을 명분으로 새 판을 짜겠다며 전원 여성인 스태프들에게 ‘전원 계약연장 불가’를 통보해 내보낸 다음이었다.

정부 지원금 예결산 보고에 맞추기 위해 1년 단위로 상근 스태프 계약을 갱신해 왔다는 그 영화제는 그런 식으로 상근 스태프 전원에 대해 비정규직 신분 상태의 고용, 해고를 반복하며 그런 행위가 ‘불법’은 아니라고 강변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평가 기준에 따라 재계약이나 승진이 이루어지게 되는 지는 공정하게 톺아볼 여지가 전혀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는 어떤 스태프도 이사진과 집행위원회 앞에서 당당할 수 없으며, 가뜩이나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조직과 함께 미래를 꿈꿀 수 없다.

그 영화제의 모진 처사에 몸서리치며 그만 두던 당시에, 당황하고 불안해하는 스태프들에게 다른 영화제의 경우 대개 프로그래머가 기자회견이나 성명서를 내서 여러분 입장을 대변하곤 하는데 원한다면 그 십자가를 지겠다고 했더니, 예전에도 이런 상황이 있었고, 그때 입을 닫고 있으면서 재계약, 승진을 했었기에 지금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해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난 한 대안언론 출신 영화기자에게 상황이 그렇다고 이야기했더니 그 기자는 “대부분의 영화제는 원래 다 그렇지 않나요? 그리고 그 영화제는 진보적인 곳인데 그럴 리가요.”라며, 그런 상황을 문제 삼는 것이 오히려 당황스럽고, 상황설명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 <카트>를 보았다.

결국 홈에버 사태는 노조 지도부의 복직 포기를 조건으로 나머지 노조원들이 전원 복직되며 일단 마무리 되었지만, 비정규직은 여전히 늘어나고 있으며, 그런 노동유연화 정책을 오히려 방패삼는 집단은 기업 뿐 아니라 민간단체, 문화단체까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예전에는 강도 높은 노동에 비해 낮은 보수와 불안정한 고용 상태를 감당하도록 하는 데에 대한 미안함 정도는 가졌던 집단조차 이제는 합법적으로 보장된 비정규직 고용이 얼마나 ‘갑질’에 효율적인지 잘 알고, 그 맛을 즐기고 있다.

   
▲ 영화 ‘카트’ 스틸컷
 

<카트>를 그 영화제에서 상영할 수 있었더라면 좀 달라졌을까? 아니면 <카트>의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현실은 영화제 스태프들과는 다른 문제라는 계급적 우월감을 갖고 있는 걸까? 만약 내년에 그 영화제가 <카트>를 초청하게 된다면 그 다음부터라도 비정규직 스태프들에 대해 다른 인식과 실천을 하게 될까?

<카트>가 개봉되는 11월 13일은 고 전태일 열사의 기일이다. 갈수록 차가워지는 날씨에 전태일 열사가 붙인 불꽃이 <카트>에 실려 비정한 노동현실을 후끈하게 덮힐 수 있기를, 그래서 세상이 더 나아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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