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대표하는 신문. 아사히입니다. 저마다 한국을 대표한다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가운데 한 신문만이라도 아사히 수준만 된다면, ‘영혼이라도 팔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한국 저널리즘에 대한 저의 기대치는 시나브로 낮아지고 있습니다.

20년 전이던가요. 아사히를 방문해 사장과 이야기 나누던 시간이 떠오릅니다. 아사히 사장은 경영 목표를 묻는 질문에 곧바로 짧게 답하더군요. 

“아사히가 좋은 독자들을 많이 만나는 것입니다.”
  
이형. 그때 내심 부러웠습니다. 과연 한국의 어떤 신문 ‘사주’가 ‘좋은 독자’를 최우선의 경영 목표로 두고 있을까 짚어보았지요. 기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사주가 그럴 수 있을까요? 그나마 중앙일보 사주가 가능성 있지만, 그 또한 자신의 ‘테두리’를 여태 넘어서지 못하더군요.

오래 전 아사히 사장과의 대화가 떠오른 것은 인터넷으로 조선일보 기사를 우연히 검색해서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우리 사회에 가까스로 뿌리내려가는 ‘무상급식’―저는 그것이 ‘공짜’가 아니라 국민 세금이라는 뜻에서 ‘복지 급식’으로 부르자고 예전 편지에서 썼습니다만, 오늘 편지에서는 논란일고 있는 명칭 그대로 씁니다―은 물론, 자신의 대선공약인 ‘무상보육’까지 결국 ‘파탄’으로 몰아가는 현실에 대해, 조선일보는 사설 “무상 복지 앞장섰던 야당이 먼저 복지 해결책 내놓아야”를 통해 야당을 살천스레 비난하더군요. 사설은 “책임을 가장 뼈저리게 느껴야 할 곳은 야권이다. 야권은 서울시장 보궐선거와 총·대선을 ‘보편적 복지’라는 구호 하나로 치렀다”고 주장한 뒤 “나라의 미래를 합리적으로 고민한 결과”가 아니라고 단언했습니다. 결론은 “무상 복지에 훨씬 더 집착했던 야권이 먼저 이 문제에 대한 해결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국민 앞에 당당히 책임지는 자세다”입니다.

야당을 비판하는 사설을 비판하면 ‘야당 편향’이라는 단순논리로 이 문제를 볼 일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정파주의’로 보는 이들이 많기에 조선일보와 같은 해괴한 주장이 버젓이 나오고 있습니다. 마땅히 시시비비를 가려야지요. 선입견 없이 살핍시다. 2012년 12월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는 박근혜 후보와의 텔레비전 토론에서 어떻게 ‘증세 없이 복지를 공약하느냐’고 구체적 수치를 들어 질문했습니다. 그때 박 후보가 한 말은 ‘그래서 내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 것’이었지요. 

정파주의에 사로잡힌 언론인이 아니라면 박근혜 대통령이 그동안 시행되어 온 복지정책마저  파탄낼 때 당연히 따져야 옳겠지요. 대통령이 되어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를. 그러나 조선일보는 야당의 무책임을 비난합니다. 대기업과 상류층의 중세를 약속했던 야당이 대체 지금 무엇을 어떻게 책임져야 할까 묻고 싶습니다. 지독한 정파주의는 ‘무상급식은 대선공약 아니다’라는 청와대 발 기사(11월10일)에서도 이어집니다. 그나마 청와대의 주장에 야당 비판을 더해 기계적 중립을 갖췄다고 평가해야 옳을까요. 아닙니다. 현대 저널리즘 이론에서 중립은 더는 핵심가치가 아닙니다. 

이형. 제가 오늘 제기하고 싶은 문제는 조선일보의 그 기사를 읽고 쓴 독자의 댓글입니다. ‘안 아무개’가 쓴 다음 댓글은 조선일보 독자들의 ‘추천’이 가장 많이 달렸더군요. 

“설사 공약이라고 해도 국가 장래를 위해서라면 폐기해도 상관 없다. 종북후보가 ‘자신이 대통령 되면 모든 국민에게 매월 1천만 원씩 주겠다’고 뻥을 치는데 보수후보는 ‘국가재정이 어려워 한 푼도 줄 수 없다’는 식으로 대결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어떤가요. 독자 추천을 가장 많이 받은 그 댓글을 보는 순간 세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첫째, 들머리에 인용한 아사히 사장의 경영목표입니다. 과연 조선일보는 좋은 독자를 만나고 있는 걸까요? 둘째, 그 연장선에서 전국언론노동조합 신학림 전 위원장이 언제나 강조했던 말이 연상되더군요. “조선일보는 신문이 아니다. 흉기다.” 조선일보 기자들로서는 듣기 거북할 수밖에 없겠지만, 객관화해서 자신들의 ‘상품’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들이 어떤 독자들을 양산하고 있는가요. 대체 대선 국면에서 어떤 후보가 ‘모든 국민에게 월 1000만원’을 준다고 했던가요? 대체 그런 사실 날조의 글을 쓰는 이유는 뭘까요? 그것을 추천하는 ‘독자’들은 또 누구인가요. 셋째, 과연 그렇게 생각하는 ‘국민’은 지금 ‘안 아무개’만일까? 어쩌면 조선일보가 가장 많이 팔리는 영남지역의 적잖은 국민이 혹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 이 또한 ‘지역감정’일까요. 단연코 아니지요. 지역감정을 조장한 언론이 현실을 오도하는 상황을 짚음으로써 지역감정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자는 차분한 제안일 따름입니다.

   

▲ 손석춘 언론인

 

 

오해 없기 바랍니다. 조중동은 죄다 악, 한경은 노상 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정파주의 저널리즘의 정체는 또렷하게 보아야 옳습니다. ‘조중동’과 ‘한경’을 동일선에 놓고 ‘정파주의 언론’으로 싸잡아 비난하는 ‘중립’적 양비론은 너무나 안일합니다. 대학교수들, 심지어 젊은 언론학 교수까지 그 비과학적 주장을 무람없이 펴는 현상이 곰비임비 나타나고 있어 무장 우려됩니다. 바로 그런 ‘담론’들이 조중동을, 한국 저널리즘을 망치고 있어서이지요. 언제쯤일까요. 우리 국민 다수가 읽으면서 그 저널리즘 품격에 자부심을 가질 때는. 한국을 대표하는 신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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