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집과 수렵, 그러니까 눈에 띄는 대로 동물은 잡아먹고, 식물은 거둬먹으며 살았다던,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던 인류가 정착을 통해 뿌리를 내리면서 문명을 일구었다고 한다. 정착을 위해 전쟁을 하고, 전쟁을 통해 정복을 하고, 정복의 대가로 점령을 하고, 점령을 유지하기 위해 억압과 착취를 하고, 억압과 착취를 피하기 위해 이주를 하는 것, 인류의 역사는 이렇게 이어져 왔다.

그러니까 풍족하고 안녕하다면 이주를 할 일이 없다. 21세기, 신자유주의 시대의 이주도 마찬가지다. 이주는 늘 새로운 정착을 목표로 하고, 그러다보니 이주민들은 먼저 정착한 선주민들과 경합해야만 한다. 재주를 겨루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조차 경합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쏟는데, 삶의 터전을 두고 하는 이주민과 선주민의 경합은 오죽하랴?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이주는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원주민을 말살하고 점령하는 학살의 역사였고, 제국주의 식민지 점령의 역사로 이어졌으며, 정착지를 갖지 못한 집시의 역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40만이 학살당하고도 아직까지 배척과 천대 속에 생존을 위협당하고 있다. 강제로 정착지를 확보하려는 유태인들의 시도는 중동지역을 20세기에 21세기 까지도 끊임없는 전쟁과 테러, 학살의 화약고로 만들고 있다.

   

▲ <김알렉스의 식당 : 안산-타슈켄트>의 한장면

 

 

우리 역시 오랜 이주의 역사를 겪어왔다. 밖으로는 고구려의 후예가 발해 멸망 이후 나라 없는 유민이 되었고, 조선 말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연해주며 간도 지역으로 흩어진 겨레들은 고려인, 조선족으로 불리고, 해방 이후 일본에서 돌아오지 못한 겨레들은 자이니치(在日), 재일조선인으로 3세대를 지나 이제 4세대에 이르고 있다.

사회구조가 바뀌고, 인구구성도 바뀌면서 안으로는 쉽지 않은 결혼이나 고용에서 이주민과 연을 맺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다. 배척, 지배, 점령으로는 결코 평화로울 수 없는 전지구적 이주의 시대에 우리는, 영화는 이주를 어떻게 관객과 나눌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행사 ‘제8회 이주민영화제’가 오는 11월 8일(토)부터 10일(월)까지 서울 성북구 아리랑 시네미디어센터에서 열린다.

이주민영화제는 이주노동자와 이주민이 주체가 되는 영화를 통해 이주노동자와 이주민, 원주민 관객 사이의 이해와 화합을 통해 한국사회의 문화적 다양성을 모색하기 위해 시작된 영화제였다. 처음에는 영화를 매개로 이주노동자의 인권과 문화 등을 소개하면서 사회적 관심을 환기한다는 뜻에서 '이주노동자 영화제'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가 2011년부터는 이주노동 말고도 여러 이유와 상황으로 한국에 정착한 이주민들이 고루 참여할 수 있도록 '이주민영화제'로 명칭을 바꿨다.

   

▲ <김알렉스의 식당 : 안산-타슈켄트>의 한장면

 

 

‘이주’의 현실이 녹록하지 않다보니 지난해를 거르고 2년 만에 열리는 이번 이주민영화제의 개막작은 김정 감독의 <김알렉스의 식당 : 안산-타슈켄트>다. 영화학자 김소영으로서 그저 지리적인 대륙으로서가 아니라 도래해야 할 인식의 지평과도 같은 공간으로서의 ‘트랜스아시아’ 연구를 통해 냉전체제, 나아가 신냉전체제에서 연구를 하면서 인터아시아 문화연구, 트랜지트, 트랜스내셔널 동아시아 연구를 지속해온 김정 감독은 '길 위에 있는 아시아 경계인'에 대해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지난 것들, 쓸모없는 것들, 사라지는 것들을 불러 모아 의미와 생명을 불어 넣는다.

EBS, 부산국제영화제, 알자지라 등이 잇달아 그런 김정 감독의 관심에 제작지원을 하게 되면서 만들어진 <김알렉스의 식당 : 안산-타슈켄트>는 감독이 안산에 학생들과 현장 수업을 다니다가 그곳의 고려인들에게 매혹되어서 만들게 된 다큐멘터리다.

중앙아시아 지역 재외한인은 근대화 이전의 조선도 아닌 그전의 나라였던 고려를 따라 ‘고려인’이라고 불린다. 러시아를 비롯한 독립국가연합에 살고 있는 재외한인을 통틀어 ‘고려인’이라고 하는데 러시아어로는 '카레예츠', 현지인들은 스스로를 고려사람(Koryo-saram)이라고 한다.

살만한 나라가 못되던 조선말, 농민들부터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망명까지 두만강 건너 조국 가까이 연해주 지역에 일구고 살만한 땅을 찾아 정착했던 이들이 뜬금없이 중앙아시아에 발을 붙이게 된 것은 스탈린의 압제 때문이었다. 1937년 9월에서 10월 사이, 그 짧은 기간 동안 이루어진 가혹한 분리와 차별 정책 때문에 다른 소수민족들과 함께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중앙아시아 황무지에 내팽개쳐진 것이다. 이렇게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이 무려 17만 5000 명, 지금은 무려 53만을 헤아린다.

안산에서 '타슈켄트'라는 식당 주인인 김 알렉스는 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 3세인데, ‘진짜’ 타슈켄트에서 건축가로 성공했었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 우즈베키스탄의 급격한 사회변화 속에서 재산을 모두 잃고 한국에 와서 ‘중앙아시아식 한국음식’을 차려내며 살아가고 있다.

김 알렉스는 한국에 처음 와서는 공사판에서 일을 했으나 3년 동안 무려 8곳에서 임금을 떼이는 억울한 상황을 겪은 후, 이주민들이 많은 지역인 안산에서 자신의 식당 타슈켄트를 운영하면서 한국에 적응해 살아가고 있다.

한국말보다 러시아어가 더 익숙한 김 알렉스의 식당을 찾는 고려인들은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쉽지 않다. 김정 감독은 그들이 나고 자란 곳, 지금도 부모형제와 자식이 살고 있는 곳인 ‘진짜’ 타슈켄트를 찾아가 김 알렉스의 가족을 만나고, 고려인들이 모이는 회관을 찾아간다. 하얀 눈에 덮인 이국땅에서 한복을 곱게 입고 춤을 즐기며, 한국에서 보내온 옷을 자랑하는 고려인 2세 노인들, 서툰 한국어로 기억과 현실을 이어 조국을 그리는 이주민들을 만난다.

이주 4세대로 접어든 지금, 김 알렉스는 안산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려한다. 그가 갈 곳은 가족이 있는 우즈베키스탄이 아니라 러시아다. 시간과 공간을 경유하며 풀어내는 김정 감독의 영상은 제국주의 시대에 시작된 이주가 냉전시기를 거쳐 신자유주의 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고단한 이주민의 목소리와 삶을 통해 중앙아시아 이주민의 고단한 역사를 짚어나간다.

이밖에도 이주민영화제에서는 이주에 대한 다양한 국내외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들을 통해 2014년 한국, 그리고 이 지구별에서 이주에 대한 현실과 고민, 공감의 지평을 스크린에 펼쳐 보인다.

   

▲ 이주민영화제 포스트

 

 

(홈페이지 http://www.mwff.org/ 모든 상영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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