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위헌 판결이 난 긴급조치 9호에 따라 영장없이 피의자를 체포 수사한 검사와 유죄판결한 판사의 행위를 불법행위라고 볼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려 논란이 일고 있다. 법조계에서조차 최소한의 법리에도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왔다.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조희대, 신영철, 김창석 대법관)가 지난 30일 서태열, 장의식씨와 그 가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서씨와 장씨는 1976년 6월 중앙정보부 대구지부로 강제연행된 뒤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아 재심청구를 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긴급조치 9호를 근거로 한 당시 판검사의 직무행위 자체는 위법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긴급조치 9호를 근거로 영장 없이 피의자를 체포해 수사를 진행하고 재판에 넘긴 수사기관의 직무행위와 유죄 판결을 선고한 법관의 직무행위는 불법행위라고 보기 어렵다”며 “긴급조치 9호가 위헌·무효임이 선언되지 않았던 이상,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또한 재판부는 “국가기관이 수사과정에서 한 불법행위가 유죄 판결과 인과관계가 있는지를 별도로 따져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할지 결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당시 ‘현행법’이었던 긴급조치에 따라 충실히 적용하고 수사→기소→유죄판결한 검사와 판사는 모두 죄가 없다는 얘기다. 긴급조치를 만든 박정희가 잘못이지, 박정희가 시키는 대로 한 판검사가 무슨 잘못이냐는 논리인 셈이다.

   
1974년 1월 개헌 청원 서명운동으로 긴급조치 1, 2호를 위한했다는 이유로 선 백기완(왼쪽), 장준하. ⓒ장준하기념사업회
 

이를 두고 판사·인권변호사 출신의 김형태 변호사(법무법인 덕수)는 31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고의과실에 해당되려면 첫째 행위와 결과가 있어야 하고, 둘째 행위가 위법해야 하며, 셋째 행위를 한 사람이 법적 책임을 갖는 사람(예-성인)이거나 넷째 그 행위로 손해가 발생해야 한다”며 “하지만 긴급조치의 경우 공무원들이 위법한 법을 집행해야 한다는 고의과실 여부를 따질 필요가 없다”고 지적했다.

김 변호사는 “당시 대통령이 정한 법 자체가 위법하다고 판단한 이상 이를 따르는 행위에 고의나 과실이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며 “위법한 법에 따라 실시한 수사는 위법한 것이고, 그에 따라 유죄판결한 것 역시 당연히 위법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재판부가 당시 현행법에 따라 판사가 판단했을 뿐이라고 아무리 주장해도 위법한 판결은 위법한 것”이라며 “당시 고의가 있었네, 없었네 하는 주장이야말로 우리 대법관들의 법률적 수준을 드러낸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 변호사는 “박정희가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하는 순간 모두가 따르게 돼 있으나, 발동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며 “긴급조치 9호 자체가 위헌인 이상, (이를 따른 행위 모두가 위법하므로) 수사나 판결 과정의 고의과실 여부를 따질 필요가 없다는 법리를 간과한 판결”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대법원 판결에 대해 당시 법률로 돼 있으면 무조건 정당하다는 사고방식이 담겨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김 변호사는 “앞선 다른 재판부의 판결에서는 긴급조치가 위헌이라고 판단했는데, 이번 재판부는 위헌법률에 따라 집행한 것은 잘못이 없다는 것부터 서로 모순을 일으킨다”며 “무엇보다 당시 법이면 다 이를 지킨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악법도 만들어놓고 따르기만 하면 범죄를 저질러도 무슨 문제냐’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그는 “더 나아가 유신도 그 시대에서는 정당했다는 식의 사고이자, 5·16이 그 때엔 쿠데타가 아니었다고 역설하는 판결”이라고 지적했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이후 양승태 대법원장이 취임하면서 대법원 구성이 관료적으로 짜인 것도 이번 판결을 낳은 요인으로 지목됐다. 김 변호사는 “대법원장이 바뀌면서 구성이 관료적으로 짜이다 보니 이들의 역사인식이 이런 위법성 평가에 반영된 것”이라며 “이런 엉터리 같은 법을 나중에도 만들어놓고 책임을 안지고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 놓은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박정희(가운데)
 

그는 “당시 법관이던 시절 그들조차 긴급조치를 두고 ‘이게 법이냐’고 생각했다가 그저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조용히 따라가놓고 이제와서는 그런 행위를 정당화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판사 출신의 박범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도 31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그동안 법원이 쿠데타에 의한 피해자 입장에서 구제하거나 인권보호하려는 측면에서는 전향적 자세를 취했으나 가해자 측면에 대해서는 소극적 입장을 견지해왔다”며 “이 때문에 긴급조치는 위헌이라고 하면서도 5·16 쿠데타나 유신헌법 자체의 위헌성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아 온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 의원은 “유신, 5·16,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들에 의해 일어난 행정작용이 무효로 보기 어렵다는 뜻이 숨어있다”며 “당시 법(긴급조치 등)에 이뤄진 수사 재판이 무효이면 그 체제에서 이뤄진 행정작용이 다 무효라고 하는 쪽으로 확대될까봐 소극적 태도를 유지했다”고 밝혔다.

박 의원은 “당시 수사와 기소한 검사나 유죄판결한 판사들이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이 꽤 있다”며 “이 때문에 법원이 타협적 판결을 한 것 아니겠느냐”고 분석했다. 그는 “이번 판결은 역설적으로 유신헌법의 법적인 무효성을 역사논쟁과 함께 사법논쟁으로 끄집어 올릴 계기를 마련한 셈”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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