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0월 24일. 사진 속의 김태진 선생은 37살의 동아방송 PD였다. 국내최초의 뉴스PD. 그러나 자유언론실천선언에 가담하고 독재정권에 싸운 이유로 이듬해 직장을 잃었다. 그리고 40년이 흘렀다. 2014년 10월 23일 만난 김태진 선생은 77살 백발의 노인이 되어있었다. 지나간 40년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 선생의 첫 마디는 다음과 같았다. “세월을 빼앗긴 것 같아.”

언론인의 사명감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독재정권은 한줌의 ‘언론인’들마저 제도권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선생은 말했다. “굉장히 억울합니다. 그래도 국민이 우리를 뒷받침해주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에 막중한 권력과 대항할 수 있었어요.” 짧은 말에 담긴 세월의 무게는, 가늠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워보였다. 백발의 언론인은 여전히 한국 언론을 걱정하고 있었다.

“세월호 사건 겪으며 느낀 것이 기자들이 취재하는 것보다 받아쓰기가 많아. 1974년 민청학련사건이 있을 때, 정부에서 자기들 발표 외에 기자들이 별도 취재해 보도할 경우 그 기자를 긴급조치 위반으로 입건하겠다고 했어. 그게 지금까지도 언론계에 뿌리를 내린 것 같아. 긴급조치는 없어졌는데, 그 긴급조치가 아직도 살아있는 것 같아…. 40년이 지났어도 오늘날 한국의 언론이 제 길을 가고 있다면 그 나름대로 위안을 받을 텐데…지금 언론이 우리 시대 언론과 별 차이가 없어.”

   

▲ 김태진 동아방송 프로듀서. 사진=정철운 기자

 

 
   

▲ 김태진 동아방송 프로듀서가 40년 전 자신의 모습을 가리키고 있다. 사진=정철운 기자

 

 

출판사 대표로 있는 그의 서재에는 책 더미와 함께 1974년 10월 24일, 뜨거웠던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담은 사진이 걸려있었다. “이게 나야.” 그가 멋쩍게 웃으며 만세를 외치는 젊은이를 손으로 가리켰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속에 전율이 오는 장면이다. 그에게 다소 어리석은 질문을 던졌다. 동아투위에 가담한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그의 대답은 망설임 없이 단호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는 투위에 가담하지 않았던 동료들보다 자신이 행복하다고 했다. 

“투위에 가담하지 않았던 친구들은 이제 딴 사람 같아. 지금은 정년퇴직해 다들 노인인데, 내가 보기에는 상당히 초라해 보이더라. 자유언론을 주장하다 쫒기고 감옥살이 하고, 그 동안 19명의 죽음도 있었지만, 그래도 올바른 일을 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던 것이 더 낫지 않았나 싶다. 짧은 생인데, 나 때문에 우리 가족이 고생했지만, 그래도 성공은 못했지만 내 길은 올바로 걸어왔어.” 

그는 최상재‧최용익 등 후배 언론인들과 매달 세 번째 토요일 산행을 즐기고 있다. “동아투위가 아니었으면 이런 후배들과 어울릴 기회가 없었을 것 같아. 우리 뜻과 맞는 후배들과 어울리니 즐겁고 보람을 느끼지.” 그가 환하게 웃었다. 

그는 동아방송(DBS) 뉴스 프로듀서였다. 동아방송은 1964년 한일회담을 풍자하는 꽁트를 내보냈다가 방송국 간부 여섯 명이 모두 구속됐다. 회사는 프로듀서를 탄압에서 지키기 위해 뉴스부를 편집국 소속으로 배치했다. 1960년대 후반 동아방송은 국내에서 처음 종합뉴스를 편성했다. 기자가 직접 뉴스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동아방송에 대한 구성원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언젠가 성균관 대학생들의 집회현장을 취재하는데 동아일보 차량만 들어올 수 있다고 하더라. 얼마나 뿌듯하던지….”

   

▲ 김태진 동아방송 프로듀서. 사진=정철운 기자

 

 

그의 이야기는 1971년 사법파동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사상범들에게 무죄를 내렸던 판사가 석연찮은 뇌물수수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되고, 이에 반발한 판사들이 집단 사표를 냈다. 그는 당시 대법원장과 부장판사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판사들은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서 변호사가 검찰과 견해를 달리할 경우 변호사를 용공분자 취급하던 정부를 비판했다. 동아방송은 사법파동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그리고 이듬해 유신이 선포됐다. 

당시 김태진 프로듀서는 취재차 정구영 공화당 초대 총재를 만났다. 정구영 총재는 김 PD에게 “박정희가 이런 사람인줄 알았으면 공화당 창당을 도와주지 않았을 것”이라 말했다. 그는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된 한국 사회를 가리켜 “지금껏 한국에는 정론지가 없었고, 혁명적 시기마다 야당 정치인들은 변화의 기회를 망가뜨렸다”고 지적했다.

1970년대, 윤주영 공보부장관은 150여명의 기자를 정부 측 홍보담당자와 해외 공보관 등으로 채용했다. 그 꼴을 보고 송건호 당시 동아일보 논설위원이 칼럼을 썼다. “언론인은 언론을 천직으로 알아야지, 언론을 징검다리로 해서 관계나 정계로 진출하려는 사람은 언론인이 아니다.” 지금도 뜨끔할 수밖에 없는 문장이다. 오늘날 ‘언론인’이 되겠다는 포부로 입사를 준비하는 젊은이가 몇이나 될까. 동아투위를 기억하는 후배들이 몇이나 될까. 선배들의 명예로웠던 투쟁을 기억해야, 의지는 계승된다. 김태진 프로듀서는 오늘도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을 가슴에 안고 40년 지기 동료들과 함께 발걸음을 옮긴다. 뚜벅뚜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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