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도활빈당의 창립을 제안하던 김만수가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방안에 모인 사람들도 저마다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   

“성님, 지는 째깐힜을 때부텀 김동필이, 심사곤이 이 노친네들이 으떤 뻘짓을 험서러 위도 사람들 등을 처묵고 사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살었는디요. 이 작자들이 서해훼리호 참사가 터진께 김두길이 이 새끼허고 굶주린 승냥이들 마냥 여리저리 날뛰고 댕김서 허는 꼬라질 가만히 지켜보자니 참말로 배창시가 뒤틀려가꼬 나 죽것는디요. 만수성 말대로요. 위도를 대표허는 지대로 된 단첼 한나 맹글어 봅시다!”

양대관의 핏발 선 눈을 날카롭게 바라보던 이순신의 시선이  눈물이 가득한 김만수를 향했다. 

“헹펜을 봉께 김동필이허고 김두길이가 작당을 혀서 맹글었다는 서해훼리호 참사 위도대책위원회허고 위도유가족협의회에 대항헐만헌 단체 한나가 꼭 필요헌 시점이라는 판단이 든다만은... 저기 만수야, 솔직히 말히서 위도활빈당이란 맹칭이 내 맘엔 쏘옥 와 닿지 않는디 으째 이런 맹칭을 쓰자는건지 쫌 더 설명을 히보니라!”

김만수는 왜 모임의 명칭을 ‘위도활빈당’이라고 제안했는지 그 배경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위도는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의 이상향 율도국이고, 이 소설에 나오는 의적단의 이름이 활빈당(活貧黨)이다. 그런가하면 활빈당은 1900년대 주로 양반, 관료, 지주 등만 공격해서 재물을 뺏은 뒤 빈민들에게 나눠주던 의적이었다. 그 시절 남부지방에서 봉기한 동학 농민군 중에서 강력한 세력을 떨쳤던 집단도 활빈당이다. 김만수는 이런 의적단을 동학혁명 100주년을 코앞에 둔 시점인 1993년 10월에 위도에서 다시 부활시켜 보자고 다시 주장한 것이다.  

“글먼 내가 말이여, 적어도 서해훼리호 참사가 원만허게 수습되는 고날까지 앞장서서 위도활빈당을 이끌고 갈턴께 동생들이 뒤를 좀 받쳐 주소 잉!”

이순신이 이렇게 당부한 뒤 술잔을 높이 쳐들었다. 

“자, 서로들 결의를 다지는 의미에서 건밸 히보더라고! 내가 위도 허믄 너그들이 활빈당히라 잉!… 위도!”

“활빈당!…”

건배를 끝낸 뒤 이순신이 좌중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앞으로 위도활빈당이 헐 일이 무신지 서로 야그들을 쪼까 나눠 봤으믄 좋겄는디…”

이순신이 위도활빈당의 향후 활동계획을 논의해보자고 제안했지만 모두가 서로를 쳐다 볼 뿐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침묵이 흐르자 양대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머니 머니 혀도 서해훼리호 참살 잘 수습허는 것이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헐일이 아닐꺼라우?”

“고거야 물론이지, 방금 내가 건밸허기 전으 힜던 말마따나 그럴라고 모임을 맹그는 것 아녀. 그건 그렇고 대관아, 아까 파장금서 차타고 옴서러 힜던 사고 현장 야그를 여그 만수도 잘 모리고, 희오나 문수도 잘 모릴턴께 막간을 이용혀서 겔차주믄 안 좋겄냐?”

이순신이 서해훼리호 참사 현장에서 민간 잠수사로 활동하고 있는 양대관에게 시신과 선체 인양작업 상황을 설명해 보라고 부탁했다.  

“글안히도 그럴 참이었는디요. 시방 객선 선체는 수심 14미터 지점서 오른쪽 직각 방향으로 누워가꼬 뻘뿌당에 파묻혀 있는 상탠디요. 물속으 조류 이동 속도가 원체 빠르다본께 해군 잠수부 80여맹이 동원됐다고는 허지만 뻘 제거작업도 그라고 뻘뿌당 굴착 작업도 그라고 작업 속도가 억수로 느린 것이 사실이고만요.”

귀를 쫑긋 세우고 양대관의 말을 듣고 있던 김만수가 물었다.   

“오늘 아침 테레비 뉴슬 보다보니, 정부는 객선을 인양헌답시고 선체에 와이어 로플 감는 작업을 내일부터나 시작혀서 물 속으 와이어 로프와 물 밖에 있는 크레인을 고리로 연결 헌 다음에 객선을 수면위로 띄울 계획이라고 허던디?”

“야, 근다고 허던디, 시방 사고 해상에는 해운산업연구원 소속 만톤급 해상 크레인 설악호허고요, 3천톤급 해군 인양선이 와이어 로프와 고리를 연결하는 작업을 허고 있는디요. 오늘도 갱물 속은 50센치 앞도 분간 헐 수 없을 정도로 시야가 안 나오고 거따가 조류도 빠르다본께 선체 인양 준비작업에 애로사항이 많다고 헙디다요.”

“유가족들은 객선 선첼 바다위로 들어올리길 원하고 있다던디, 대관이 니 생각엔 이 일이 앞으로 어찌끼 진행될 것 같냐?”

“정부 방침은 유가족들 생각허고 영 딴판인디요. 객선에 들어 있는 뻘을 모다 제거헌 다음에 선체 인양작업을 헌다고 헙디다.  그리야만 선체 파손으로 인헌 시신 손상을 막을 수 있다고 허던디요.”

“그러믄 시신 인양작업이라도 서둘러야 되는 것 아녀?”

“만수 성님 말도 틀린말은 아닐턴디… 사실은요, 사고 다음날인 그저끄 부텀 시신 인양작업을 실시허고는 있는디 선실로 통하는 문 한나를 뿌수고 특수요원들이 들락거릴 수 있는 통롤 게우 한나 확보힜을 뿐입니다. 시신 인양 작업에 속도가 붙을라믄 잠수사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가꼬 시신 한 구씩을 들고 나와야 허는디, 통로가 좁다봉께 고것이 불가능혀서 작업 속도가 솔찬히 늦어지고 있는 것이지라우.”

“고것 참 환장헐 일이고마 잉!”

“그라긴 허요만 시신 인양작업은 갱물이 거의 움직이지 않는 물때인 내일 이후에나 본격적으로 이루어 질 것 같고만요.”

“승무원들이 생존해 있다고 언론허고 정부가 지랄 임벵들을 떨고 있는데 대관이 넌 승무원들이 살어 있다고 생각허냐?”

“성님, 사실은요. 지 깜냥에는 조타실 안으로 으떻기든 들어가서 영범이 아버지 허고 최 선장님 시신이 고 안에 있는지 확인을 히볼라고 맻번 목숨을 걸고 시돌 혀보았는디요. 매번 허탕을 쳤고만요. 그럼서 여러가지 생각을 허게 되었는디, 그동안 구조대원 맻놈이 조타실 안에 들어가서 고 안에 승무원들 시신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을 힜을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내 생각이 허무맹랑허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일 수 있겄지만 오죽 답답허믄 이런 억측을 허겄습니까? 아무튼간에 지 짧은 생각으로는 어쩌믄 정부는 폴쏘 승무원 사망 사실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럼서러도 역부러 승무원들이 도망쳤다고 시상을 떠들썩허게 맹글었다고 생각허는디요, 무능헌 정불 향한 비난의 화살을 승무원들헌티 돌려 놓아야 지들 신간들이 편헐 것 아니오. 씨발, 요새 경찰이나 검찰 이 새끼들이 넘부끄런 줄 모리고 껍쩍거리는 꼴을 본께 참말로 호로 상놈으 새끼들이 틀림읎다는 생각이 든당께요, 흐으윽!…”

양대관이 하던 말을 다 맺지 못하고 흐느꼈다. 이번에도 방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훔쳤다. 승무원 생존설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아 심신이 지쳐있는 임영범의 곡소리는 유난히 컸다.

“사고 현장에서 눈을 뜨고 볼 수가 읎는 일이 으디 한 둘이겄소만 육지서 온 민간 다이버 새끼들 일부가 허는 짓꺼리도 참말로 구역질이 나서 못 봐 주겄는디, 글씨 이 개새끼들이 말이요, 다 그런 건 아니겄지만, 객선서  넘으 가방이나 짐보따릴 뒤져가꼬 돈허고 귀중품을 훔치고, 심지어는 시신들 몸에 걸치고 있는 목걸이에 시계, 팔찌까지 슬쩍허는  것 같은디, 아 씨발 이 양아치 새끼들허고 얼굴이 마주치믄 자꼬 내 주먹이 올라갈라고 히싸서 웬간허믄 앞으로 사고 현장에 안 나갈 생각이고만요. 흐으윽!... 어엉어어어!…”

“뭐라고야? 시신을 건지러 물속에 들어간 민간 잠수사들이 시신들 유품을 훔친다고야? 흐으윽, 어엉어어!…”

양대관과 김만수의 곡소리가 점점 커지자 방안의 사람들도 또 다시 훌쩍거렸다. 다들 험악하기 짝이 없는 세상 인심에 치를 떠는 듯 했다.

“위도활빈당이 할 일이 또 머 있겄냐?”

눈물을 훔치다 말고 이순신이 코맹맹이 소리로 이렇게 묻자 이번에는 오세팔이 입을 열었다.

“시방 위도 주민들은 느닷읎이 발생헌 서해훼리호 참사로 거진 다 대그빡에 총을 맞은 사람들 마냥 공황상태에 빠져 있다만 불과 닷새 전까지만혀도 새만금 방조제 보상금 문제가 위도 주민들의 가장 큰 관심사였는디, 영광원자력 발전소 건설 헐 때도 위도 사람들은 보상금 한 푼 못 받었고, 새만금 방조제 축조를 헌다고 요새 보상금이 부안, 군산, 김제 일대에 몽뗑이로 쏟아지고 있는디도 우리 위도 사람들은 십원 짜리 한 푼 귀경헐 수가 없어가꼬 실망들이 큰 디, 이 문제도 씨발 김두길이 이놈으 새끼들헌티 맽겨 놓을 순 읎는 일 아녀!”

이순신은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위도의 중요한 현안이기 때문이다. 

새만금 간척사업. 전북 부안군 대정리에서 군산시 비응도를 연결하는 33.9km 길이의 방조제를 쌓아서 간척지를 만들겠다는 국책사업이다. ‘새만금’이라는 이름은 김제­만경평야(金堤­萬頃平野)에서 따 왔다. 예로부터 ‘김제­만경’을 줄여서 ‘금만(金萬)’이라고 불려왔는데 앞뒤를 바꿔 ‘만금(萬金)’이라는 지명을 만들었고 그 앞에 ‘새롭다’는 ‘새’자를 붙여 ‘새만금’이라는 지명을 만들어낸 것이다. ‘새만금’이라는 지명 속엔 김제­만경평야처럼 광활한 농토를 바다 위에 조성해 보려는 열망이 담겨 있다. 

아무튼 이 새만금 간척사업은 6년 전인 1987년 12월10일부터 공론화되었다. 태민국이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 공약사업으로 발표하면서 국책사업으로 부각된 것이다. 당시 태민국 후보는 “새만금 사업을 최우선 국책사업으로 선정해 임기 내 완성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사실, 이 사업은 그 이전부터 추진돼 왔다. 1970년대에 장기적인 국책사업으로 시작한 서남해안 간척사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새만금 사업은 1971년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예정지가 결정됐고 기초조사도 이루어졌다. 1986년부터는 경제적인 타당성 조사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재원 조달의 어려움과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 등으로 사업을 추진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러나 태민국 후보는 이 프로젝트를 선거 공약으로 채택해 대선을 불과 엿새 앞두고 전격 발표했다. 6월 민중항쟁의 결과 여야 합의로 만들어진 헌법에 따라 1987년 12월16일, 1972년 10월 유신으로 없애버린 국민들의 직접 투표에 의한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선거 결과 태민국 후보가 36.6%의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에 따라 단군 이래 최대의 간척사업이자 토목공사이며 투자유치사업이라는 새만금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지난 1991년 11월28일, 성대한 기공식이 열렸다. 이렇게 서막이 오른 새만금 간척사업은 지난해 봄 치러진 총선과 연말의 대선 등 선거 때마다 뜨거운 쟁점으로 등장해 유권자들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고 있다. 어떤 후보자는 오늘의 새만금 사업은 자신의 공로로 이루어졌으며 앞으로 조기에 이 사업을 마무리 할 수 있는 적임자는 ‘바로 나’라고 주장했다. 작년 연말, 한 대선 후보는 “내가 대통령이 되면 5년 안에 새만금 간척사업을 완공시키겠다”고 장담하더니, 한 달 뒤에는 “2년 안에 완공시키겠다”고 큰소리쳤다. 

애당초 태민국 후보가 새만금 간척사업을 대선 공약으로 내건 배경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선에 출마하는 태민국 전 대통령이 ‘호남푸대접론’이 선거 쟁점으로 떠오르자 호남 지역의 득표전략으로 삼기 위해 공약을 급조했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그런데 이 사업이 진행되면서 이러한 주장이 틀리지 않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났다. 

새만금 간척사업을 비판하고 있는 측은 “새만금 사업은 경제적­기술적 타당성도 없고, 환경파괴와 자연 훼손에 대한 검토도 없었고, 여론수렴도 없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안타깝게도 모두 사실로 드러났다. 국민 1인당 3평씩 나눠줄 수 있다는 광활한 간척지, 여의도 면적의 140배이고 부산광역시만한 새로운 국토를 만들어 낸다는 새만금 간척사업을 선거철마다 여야는 최대의 카드로 악용하고 있다. 그런데 위정자들은 국가의 운명이 달려 있고, 세계 최장의 방조제를 쌓아 세계 최대의 간척지를 조성한다는 이 초대형 국책사업을 밀실에 모여 야합을 통해 추진하고 있다. 

한편, 전라북도에서는 새만금 사업을 반대하거나 비판하면 매향노 취급을 받기 일쑤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행위’로 취급받는다. 전북 지역 정치인과 경제인은 물론이고, 전북도민 중 상당수도 이런 여론몰이에 합세하고 있다. 지금까지 사업추진 과정에서 숱한 논란과 잡음이 발생했는데도 불구하고 은연중 새만금 사업에 대한 부정적인 언행을 보이면 대번에 반지역적인 인사로 낙인이 찍힐 정도다. 지역 정서가 이렇다보니 전북의 관료나 학자는 물론이고 일반 도민들도 가타부타 말을 삼가는 분위기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적인 규모의 갯벌이라는 새만금 일대의 갯벌과 황금어장 칠산바다의 운명은 백척간두에 서 있는 것이다. 

“서해훼리호 문제, 새만금 문제, 그 밖에 머 또 할 일은 읎것냐?”

모두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데 술상에서 조금 떨어져 앉아 있는 조희오가 입을 열었다.

“대한민국을 엎어버립시다. 제가 배천 조간데요. 저희 조가 집안엔 조헌이라는 역사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조선 중기 때 문신이자 의병장인데요. 임진왜란 때 충북 옥천서 의병을 모아 영규 대사가 스님들을 모아 이끌었던 승군과 함께 청주성을 수복했습니다. 그 뒤 충남 금산에서 전사하셨는데, 그 분의 순절지가 바로 칠백의총입니다.”

“아니 희오야, 대한민국을 엎어버리잠서 으째 칠백의총 야그를  꺼내는 거여?”

“저는 저희 집안 어른의 혼백이 살아 숨쉬고 민족의 힘을 상징하는 그 칠백의총을 대학 시절에 두 차례 다녀왔습니다. 칠백의총 답사를 하면서 저는 이 나라를 망가뜨리고 있는 7백명만 몰아낸다면 대한민국은 참 좋은 나라, 정말 아름다운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오늘 출범하는 위도활빈당을 국회의원, 재벌들, 장차관들, 국무총리에 대통령까지 모조리 싹 몰아내는데 앞장을 서는 의적단으로 키워가면 좋을 것 같은데, 여러 형님들 생각은 어떠신지 모르겠네요!…”   

조희오의 입에서 주워 담기 힘든 살벌한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자 술상 앞에 앉아 있는 동갑내기 박문수가 끼어들었다.  
“야 임마 희오야, 너 시방 무슨 소릴 허는 것이여? 너 미쳤냐, 엉?”

“미치긴 임마, 내 정신 멀쩡하니 헛소리 말고 저리 비켜봐!… 저기 형님들, 활빈당이라면 그 정도 활동을 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

“활빈당이 아니고 위도활빈당이라고 임마!”

박문수가 다시 제지하고 나섰다. 

“아 이 새끼 참, 끼어들지 말라니까 또 나서네! 임마, 그런 일도 못할꺼면 무신 활빈당이여? 그냥 위도지킴이라고 허믄 되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조희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자 박문수는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천장으로 돌렸다. 순간 방안은 조용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위도활빈당이라는 명칭에 부담을 느끼고 있던 이순신은 눈을 크게 뜨고 조희오를 바라보았다. 

“위도활빈당 보다는 위도지킴이가 차라리 안 낫겄냐?”

이순신이 조희오의 눈치를 슬슬 살피며 이렇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방안엔 다시 침묵이 흘렀다. 

“순신이 형님, 그냥 위도활빈당이라고 헙시다!”

김만수가 위도활빈당을 고집하고 나섰다.  

“방금 전으 희오 얘기에 저는 전적으로 동감헙니다. 지금 위도인들이 겪고 있는 이 고통은 위도 사람들만으 고통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고통이라고 생각허는디요, 두 분 형님허고 여러 동생들도 잘 알겠지만 저는 공수부대 복무를 허다가 5·18 때 광주에 진압군으로 투입돼서 참 못된 짓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그러다 천벌을 받았는지 이렇기 다리 빙신이 됐는데, 제 업고 때문에 이렇기 됐다고 치부를 할 수도 있겠지만 다리 빙신으로 이렇기 오랫동안 흐으윽!… 지가요 흐으윽… 다릴 절며 이렇기 한 15년 살면서 아마도 수 만 번 제 박복헌 팔짜를 곱씹어 봤을 겁니다. 근데요, 흐으윽!… 이건요, 흐으윽!… 결코 제 개인만의 업고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나라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업고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흐으윽!… 엉어어어!…”

김만수는 복받쳐 오르는 설움을 견디기 힘든지 하던 말을 잠시 멈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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