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삼성백혈병 문제를 두고 언론에 고개를 숙였을 때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은 환영했다.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은 피해자와 가족들의 아픔을 헤아리고 합당한 보상을 하겠다고 말 했다. 삼성 직업병 문제제기 이후 7년 만의 공식입장이었다. 반올림은 이것이 시늉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사과, 재발방지대책, 보상에 대해 논의할 것을 요구했다. 

권 부회장의 사과 이후 교섭단이 꾸려졌다. 삼성 교섭단의 중심은 커뮤니케이션팀이었다. 직업병 문제에 안전보건관리 책임자가 아닌 커뮤니케이션팀이 나온 것이다. 교섭이 진행될수록 삼성이 왜 그랬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진정성 없는 대화가 맴돌았다. 삼성은 수차례 중재· 조정기구를 언급했다. 책임을 면피하려는 의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반올림은 내용 있는 사과를 요구했지만 삼성 교섭단의 대답은 같았다. “이미 여러 차례 사과를 했다.” 언론에 공식적으로 발표한 권오현 부회장, 이인용 사장의 사과를 말하는 것이었다. 재발방지대책에 대해서도 “이미 하고 있다. 법을 준수하고 있다”며 논의를 피했다. 삼성은 단 하나만 이야기하고 싶어했다. 보상과 중재·조정기구가 그것이다. 

교섭은 진척될 수 없었다. 삼성은 반올림의 ‘무리한’ 요구 때문에 교섭이 진척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 와중에 반올림과 함께하던 피해가족 6명이 가족대책위(가대위)를 꾸렸다. 가족대책위와 삼성은 중재·조정기구에 합의했다. 그간 삼성이 계속 요구하던 것이었다. 삼성은 가대위의 요청을 10분 만에 받고서는 “고심 끝에 결정했다”고 말했다. 능청스러웠다. 

교섭단에 포함된 피해가족은 고작 8명이다. 밖에도 수많은 피해자가 있다. 밖에서 교섭을 지켜보는 피해자들은 속이 탄다. 그래서 최근 37명의 피해자들은 성명서를 내고 삼성에 이렇게 요구했다. “‘마음을 담아 사과하세요”, “보상을 할 때 피해자들을 함부로 가리지 마세요”, “우리들의 알 권리를 침해하지 마세요”, “다시는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재발방지대책을 철저히 마련하세요.” 

교섭의 본질은 7년 동안 황상기 씨가 얘기해오고 있는 ‘내 딸 황유미의 죽음 진상 규명’ 이고 다른 피해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기 위한 ‘재발대책 마련’이다. 게다가 법원은 고 황유미·고 이숙영의 죽음을 산업재해로 인정했다. 이제 피해자와 가족들은 삼성으로부터 들어야 할 말이 더 많아졌다. 

교섭에 오지 못하고 투병하거나 돌아가신 분들도 마찬가지이다.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피해자가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반올림은 교섭에서 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펼칠 예정이다. 반도체 직업병 예방대책 마련을 위한 토론회, 알권리 선전전, 삼성에서 일한 노동자 수십 명의 집단산재신청 등이 남아있다. 

   

▲ 권영은 반올림 활동가

 

 

교섭을 진행하면서 참 오랜만에 기자들을 만났다. 7년 동안 못 봤던 경제지 기자들이 교섭장 밖을 오가며 반올림 교섭단의 동태를 살폈다. 하지만 언론이 침묵했던 지난 7년의 시간과 지금은 전혀 다르지 않다. 교섭장을 빠져나오기도 전에 삼성에 유리한 기사가 나왔고 반올림이 삼성을 향해 던진 성명서는 왜곡·유통됐다. 

진심 없는 삼성의 교섭 방식을 진심 없는 언론들은 그대로 받아쓴다. 교섭단 밖의 피해자들을 생각한다면 그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번 교섭은 몇 명의 피해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모든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이 이번 교섭을 주목하고 있다. 더 이상 언론이 삼성의 입장만을 받아써서는 안 되는 이유다. 반올림의 토론회와 선전전에서도 교섭장에서 봤던 많은 기자들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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