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걸 뭐라고 부르죠? 장기 투쟁 사업장에서 요구사항을 천에 적어 등에 붙이는 거요.” 

노동조합 전임 활동 4년 만에 ‘몸자보’를 처음 주문하며 던진 질문이었다. 그리고 지난달 22일, 회사의 창간 32주년 기념식에서 전자신문지부 조합원들의 가슴에는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문구가 박혀 있었다.

지난 2009년, 쌍용자동차 노조가 77일 파업 과정에서 ‘억울한 대량 해고로 인해 사람이 죽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며 내건 슬로건이다. 

이후 너무도 안타까운 죽음들로 인해 말 그대로 “해고는 사람을 죽이는 행위”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파업 투쟁을 하거나 거리에서 노숙 농성을 하는 사업장이 아닌 한 작은 언론사에서 조합원들은 왜 이 구호를 입에 담아야 했을까.

지난 8월 22일, 근속 20년을 앞둔 동료이자 조합원이 회사로부터 급작스러운 해고 통보를 받았다. 회사는 누가 보더라도 ‘해고사유’가 될 수 없는 사유들을 끌어 모아 ‘해고’를 결정했다. 난생 처음 받아본 ‘해고 통보서’에 적힌 ‘해고’라는 두 글자는 너무도 비현실적이었지만 이후 해고자의 삶에 찾아온 고통은 너무도 적나라한 ‘현실’이었다.

해고자가 입사 이후 근 20년을 몸담아온 직장은 단순히 임금을 받기 위해 오가는 장소가 아니었다. 그의 인간관계, 삶을 이루는 총체적 근간이었다. 그럼에도 회사가 한 사람의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길거리에 내동댕이치는 과정은 너무도 신속했다. ‘즉시해고’에 따른 해고예고수당을 지급하고, 퇴직금을 정산했다. 대출금을 즉시 전액 상환하지 않으면 신용 불량자가 된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추석 전날, 인사위원회 재심 통보로 ‘최종 해고’를 결정했기에 해고자는 차마 고향에 가지 못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언제 직장 의료보험 해지 통보가 갈까 노심초사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도대체 무슨 말로 중학생 아들에게 이 악질적이고 부당한 해고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까.

회사 앞 1인 시위를 하는 해고자의 옆을 스치는 동료들의 시선 역시 해고 이전처럼 편안할 수는 없다.

회사가 한 사람에게 ‘해고’라는 낙인을 찍는 순간 해고자의 삶을 결코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해고는 살인’이다.

쌍용자동차 파업에서 내걸었던 또다른 슬로건이 있다. “함께 살자.”

도처에서 이어지는 ‘사회적 살인’을 막고 ‘함께 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해본다. 점점 강고해지는 자본 권력과 돈 지상주의로 인해 사회 전체에 비정상이 정상 행세를 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곁에 있는 타인을 돌아볼 여유 따위 없이 개인의 생존을 위해 전력투구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진리로 받아들여진다.

회사가 제시한 취업규칙상 해고의 사유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 이를 꺼내 살인의 무기로 삼은 것은 어쩌면 이런 ‘뻔뻔한’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은 결과다.

   

▲ 김유경 전국언론노조 전자신문지부 지부장

 

 

회사가 바라는 것은 동료에 대한 부당해고가 벌어진 뒤에도 직원들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일하고, 월급 받으며 ‘이전처럼’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해고 이후 대표이사는 ‘담화문’에서 “직원들이 불필요하게 고용 불안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부당함에 함께 맞서 싸우지 않는 한 제2·제3의 부당해고는 조금 더 쉽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더 후안무치한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상식처럼 자행될 것임을.

그래서 우리는 해고자가 복직하는 날까지 맞잡은 손을 놓지 않기로 했다. ‘함께 살기’ 위해 우리는 이 해고를 결코 타인의 고통으로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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