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훼리호 참사 발생 나흘째인 1993년 10월13일 수요일. 언론은 최 선장과 갑판원 임사공 등 승무원들의 도피설을 퍼뜨리며 요란을 떨었다. 언론은 지명수배가 내려진 승무원들의 얼굴을 신문과 방송을 통해 전국 각지에 알리고, 검․경합동수사본부는 한시바삐 범법자들을 체포해야 한다며 대국민 호소에 나섰다. 특히 검찰은 최 선장이 장기 은신을 결심하게 된다면 검거가 쉽지 않고 다른 생존 승무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국민들의 제보를 당부한다고 했다.  

수사를 총지휘하고 있는 L부장검사는 “승무원 중 최소한 최 선장만큼은 살아 있다고 강력히 주장한다”며, “강력한 추정에 대해 98%쯤” 확신한다고 말했다. 이런 확신에 차있다 보니 검․경합동수사본부는 “지금까지 수사 결과, 최 선장 생존은 소문을 넘어선 사실이라는 결론을 지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최 선장의 신병 확보에 모든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고 덧붙였다.  

검찰이 이렇게 판단하고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우선, 서해훼리호에 최 선장이 승선했느냐하는 점이 관건인데, 이에 대해 생존자인 부안경찰서의 L경장 등은 여객선 탑승 후 최 선장을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두번째 관건은 참사 현장에서 최 선장을 목격했느냐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참사 당일 자신의 소형 고깃배를 타고 생존자 및 실종자 구조작업에 나섰던 위도 주민 S씨가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마지막으로 위도 파장금항에서 최 선장을 본 사람이 있느냐 하는 점인데, 식도리 고깃배 선원 등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고, 서로 대화까지 나누었다”고 진술했다. 검찰은 이렇게 목격자들의 진술이 시간대별로 연속성을 갖고 있다며 다른 승무원들의 생사 여부는 몰라도 최 선장만큼은 분명히 살아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최 선장은 지금 어디에 숨어 있단 말인가. 검찰이 추적하고 있는 도피처는 우선 위도 본섬이다. 그 다음은 식도 등 위도의 부속섬들, 그리고 세번째는 고군산도 등 위도 주변의 섬과 육지다. 검찰이 받은 여러가지 제보나 풍문 중에는 “최 선장이 중국으로 밀항을 시도하다가 중국 어선에 구조됐다”는 내용도 있고, “동남아나 필리핀 등으로 밀항했다”는 내용도 있다. 하지만 검찰은 이런 풍문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하고 있다. 수사본부에는 또 “군산 터미널에서 봤다,” “밤늦게 파장금 최 선장네 집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는 등 갖가지 제보가 접수됐다. 

그러나 검찰은 최 선장이 섬 보다는 육지로 도피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보고 있다. 왜냐하면 최 선장은 1970년대부터 위도와 곰소․격포항을 연결하는 정기여객선의 승무원으로 일한데다 위도 출신이어서 이 일대엔 얼굴이 꽤 알려져 있다. 때문에 최 선장은 진즉에 위도를 떠나 뭍으로 도주했을 것으로 검찰은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검찰은 전북의 부안, 전주, 군산, 전남의 영광 등지의 최 선장과 줄이 닿을 수 있는 연고지에서 수사를 벌이고 있다. 그러면서 위도 현지도 샅샅이 뒤지고 있다. 전경 수백 명과 형사 수십 명을 동원해서 위도의 야산과 민가를 일제히 수색하는 등 대대적인 검거활동을 펼치고 있다. 

검찰이 소환, 조사한 목격자 중 어떤 사람은 “여객선 참사 당일인 지난 10일 정오쯤, FRP어선에 최 선장이 감색 제복 차림으로 타고 있었는데, 파장금항에 내려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고 진술했다. 그러면서 “당시 최선장이 타고 있던 배는 10톤급 흰색 FRP선박으로 키가 아닌 핸들로 배의 방향을 조종하는 신형 어선이었으나 위도나 격포 지역의 선박은 아닌 것 같았고, 명찰을 패용한 최 선장은 왼손에 빨간 모자를 들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진술을 확보한 검찰은 최 선장을 참사 현장에서 파장금항까지 태우고 갔다는 그 FRP어선을 찾기 위해 격포항과 곰소항 등 인근의 항구에 소속돼 있는 FRP어선들을 일일이 조사하고 있다. 아울러 위도에 비상 경계령을 내리고 모든 선박에 대한 입․출항을 통제하고 있다. 

참사 다음날인 11일 오전엔 사고 해역에서 40여㎞ 떨어진 전남 영광군 낙월면 송이리 동북방 2㎞ 해안에서 ‘서해훼리호 25인용’이라는 글자가 찍힌 구명보트 하나가 발견됐다. 이에 수사본부는 최 선장 등이 이 구명보트를 타고 도피했을 가능성도 열어 두고 있다. 검찰은 이 구명보트를 정밀 감식하고 있으며, 광주지검에 수사 협조를 의뢰해 영광군 일대에서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있다. 

오늘 오후엔 위도에서 30㎞ 떨어진 군산시 오식도에 최 선장 등이 은신해 있다는 제보가 들어와 수사본부는 오식도에 수사대를 급파했다. 경기도 안양경찰서는 동안구의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수배가 내려진 서해훼리호 갑판장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버스에서 내려 수원 쪽으로 갔다는 제보를 접수한 뒤 추적에 나섰다.           

수사본부에 접수된 또 다른 제보 중엔 “최 선장이 위도면 식도에서 전주로 누군가에게 전화했고, 전주에서 전화를 받은 사람이 다시 위도 주민에게 최 선장이 살아 있다고 전화했다”는 내용도 있다. 그리고 “최 선장과 가까운 위도 주민 한 사람이 최 선장 등 승무원을 구조한 뒤 격포나 위도에 내려 주고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제보도 있다. 수사본부는 이 제보들의 사실 여부를 확인 중이다.  

이렇게 어제 아침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최 선장과 임사공 등 서해훼리호 승무원 생존․도주․도피설 소동은 오늘도 전국을 떠들썩하게 하며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수사대는 심지어 위도의 민가까지 샅샅이 수색했지만 승무원들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위도 본섬도 넓지만 식도, 거륜도, 왕등도 등 3개의 유인도와 수십 개의 무인도를 뒤져서 도피 중이라는 승무원들의 은신처를 찾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위도의 야산 중엔 만만치 않게 깊은 곳도 있다. 해안가엔 동굴도 수십 개가 있다. 그러다보니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승무원들의 은신처를 찾아내기란 위도를 대표하는 해수욕장인 도장금 백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검찰은 최 선장과 임사공 등 승무원 가족들을 상대로 수배자들이 자수하도록 설득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전주에 살고 있는 최 선장의 큰 아들은 물론이고 위도 진리에 있는 임사공의 외아들 임영범에게 수사대를 급파해 아버지의 자수를 설득해 달라고 종용했다. 업무상과실치사혐의로 전국에 지명 수배가 내려진 상태에서 현재 승무원 가족들이 받고 있는 상처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데도 검찰과 경찰은 승무원 가족들의 가슴 가슴에 비수를 꽂으며 자수 설득에 나서달라고 닦달하고 있다. 

“희오야!…”

대리마을 뒷산인 까끔산 아래 띠뱃놀이전수관 근처에 터를 잡고 있는 조희진네 집 안방에 짱구가 들어왔다. 이 방은 나흘 전까지 조희오의 어머니 이춘심과 아들 동해가 쓰던 방이다. 이 방에 추레한 차림의 짱구가 들어오자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조희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괜찮냐?”

“네, 괜찮습니다!”

짱구는 고약하게 옆으로 쫙 찢어진 눈으로 조희오의 머리를 감고 있는 붕대를 살펴보더니 약간 탈착된 반창고를 솥뚜껑만한 손으로 살살 눌러 제자리에 붙여주었다. 

“감사합니다. 형님이 아니었으면 오늘 제가…”

오늘 꼭두새벽 원당 아래 바위에서 떨어져 사경을 헤매던 조희오를 구해준 사람은 짱구였다. 석금 방파제에 정박 중이던 칠산호에 오른 조희오가 마치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날뛰자 짱구는 서둘러 배에서 내렸다. 조희오는 전막리로 달려가서 세워 두었던 차를 타고 대리 당산나무 아래에 도착한 뒤 손전등을 들고 험준한 산 정상에 있는 원당에 올랐는데, 다행히 그 뒤를 짱구가 밟았다. 덕분에 조희오는 심한 출혈 끝에 정신을 잃은 직후 짱구와 함께 원당에 오른 조희택에게 발견되었다. 짱구는 조희오를 둘러업고 산 아래로 내려왔고, 조희택은 당산나무 아래 주차돼 있던 용달차에 동생을 싣고 진리에 있는 위도보건소로 급히 이송했다. 

“근데 형님은 오늘 사고 현장에 안가셨습니까?”

“어 너그 희진이 성허고 희택이 성이 배 타고 파장금으로 나갔고, 난 정심도 못 묵고 하루 첨드락 석금 장불서 그물일을 허다 들어 왔는디, 너 혹시 오늘 새복에 귀신헌티 홀린 것 아녀, 한밤 중으 당까지 올라가게…”

“그건 아니구요. 꿈 때문에 그랬던 건데…”

“꿈 때문이라고야? 대간절 무신 꿈을 꿨간디?”

“사실은요…”

조희오는 어젯밤 진리 이춘녀네 작은방에서 꾼 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 가운데는 ‘동학당 수괴 수급’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는 유골 이야기도 포함돼 있다.

“너 방금 뭐시라고 혔냐?”

조희오의 꿈 얘기를 듣고 있던 짱구가 물었다.

“무슨 얘기요?”

“너 방금 그맀잖여. 동해를 안고 X나게 뛰어서 전막리 입구까지 도망와가꼬 품안에 안고 있던 동해 얼굴을 들여다볼라고 가로등 불빛 다 비춰 봤더니 사람이 아니고 해골박적을 안고 있었는디, 그 해골박적에 무신 글자가 쓰여 있었다고?”

“네, 그 유골에 동학당 수괴 수급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었습니다.”

“동학당 수괴 수급?… 혹시 너 재작년 대리 띠뱃놀이 행사 때 일본서 왔다던 노처녀 여교수 생각나냐?”

“글쎄요…”

조희오는 눈을 감고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만 3년이 돼 가는1991년 음력 설날 무렵의 기억을 되작되작 들추어 뒤져보았지만 일본에서 왔다는 여교수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문수랑 너랑 고 여교수허고 정월 초이튿날 내 방서 임마 밤새도록 술을 퍼마셨잖여! 그 여교수가 배불뚝이 너그 각시가 진도 출신이랑께 혹시 이런 사진을 본적 있냐고 물어 봤잖여!…”

“아하, 그때 본 사진이 동학군 지도자 사진이었지…”

조희오는 기억을 되살려 냈다. 일본에서 위도로 띠뱃놀이를 취재하러 온 미혼의 40대 여교수가 진도에서 수습된 동학군 지도자의 유골사진이라며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 여교수는 “그 유골은 일본군에 학살당한 뒤 목이 잘린 동학 농민군 지도자의 머리뼈이고, 1900년대 초기 한 일본인이 진도에서 일본으로 가져갔는데, 현재 일본의 한 대학교 연구실에 보관돼 있다”는 말을 했던 것 같다. 

“내 방에 말이다. 동학 관련된 책이 맻권 있는디, 필요허믄 갖다 줄꺼나?…”

“아니 형님이 동학 공불 하고 계신가요?”

“어쩌 야가 오늘 날 씨석씨석 건들어싼다냐! 너 가끔씩 보믄 먹물쪼까 쳐먹었다고 데데허기 개폼 잡음서 내가 조직이 뱃놈이라고 무실허는디, 내가 임마 으떤 잡놈인지 참말로 니가 몰라서 이러는 것이여, 잉?”

조희오는 무안한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사실 짱구는 간단한 인물이 아니다. 입만 열면 거침없이 쏟아내는 짱구의 허풍과 자랑에 따르면, 그는 남해안 다도해의 한 섬에서 태어나 조실부모했다.  목포의 주먹패들과 어울려 10대를 험악하게 보냈다. 그러다 20대 후반에 사람을 사고파는 인신매매단에 합류했다. 전국 각지에서 노숙자 등 남자들을 납치해 전라도 남해안과 서해안 일대의 고기잡이 어선이나 김양식장, 염전 등에 팔고, 가출 소녀 등은 사창가 등에 파는 직업소개소 사무장으로 30대 후반까지 일했다. 벌써 40대 중반의 나이에 들어선 그의 말이 참말인지 거짓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런 계통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처럼 얼굴은 물론이고 복부와 넓적다리 등엔 칼자국이 선명하게 아물어 있다. 등과 팔뚝엔 여러 형태의 문신이 조잡하게 새겨져 있다.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은 지난 1990년 봄, 조희진이 목포 직업소개소에 몸값으로 3백만원이나 주고 짱구를 위도로 데리고 들어오니 가까이는 대리와 전막리의 고깃배 선원들이, 멀리는 식도와 파장금의 선원들까지 목소리를 낮추고 몸을 사렸다.  

“내가 너헌티 팽상시 가끔씩 허던 말이 뭐시냐?”  

짱구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감을 잡지 못해서 그러는지 조희오는 안경을 벗고 눈을 비빈다음 양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시상일이 어거지로 안 되는 것이여, 때가 있는 것잉께 그 때를 지둘림서 늘 사람을 귀허기 여기고, 정성껏 대해야 언진가 그 때가 왔을 때 성공을 헐 수 있다고 내가 힜냐 안힜냐?”

조희오는 대답 없이 안경을 썼다. 

“난 5.18 때 광주서 죽다 살아났고, 삼청교육대 끌려가서 내가 골뱅은 들었다만 죽지는 않고 살어남었다. 그라고 수많은 싸움판서도 운 좋기 살어남었는디, 내가 파란만장헌 인생을 삼서러도 죽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렇기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 뭐신지 아냐? 난 말이여, 팽소 나보다 힘도 약하고 쌈도 못허게 생긴 사람은 절대 먼저 공격허지 않는다. 참고 또 참다가 내 대끄빡 뚜껑이 확 열리믄 그땐 씨발 너 죽고 나 죽자고 덤비는디, 그렇기 살어서 그런지 절체절명의 위기으 순간마다 날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어가꼬 내가 임마 오늘날까장 이렇기 멀쩡허기 살어있는 것이여!”

짱구가 험한 막장 인생을 살아온 것이 사실인 듯하다. 분명 그는 인정도 있고, 의리도 있다. 나름대로 독특한 인생철학도 갖고 있다. 그런데다 조희오의 어머니인 이춘심은 물론이고 동네 어른들을 예를 갖춰 잘 모셨다. 겉보기와 다른 짱구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는터라 조희오는 그를 함부로 대한 적이 없고 늘 친형처럼 따르고 있다.    

“희오야!…”

집에 손님들이 찾아 왔다. 이순신과 임영범, 그리고 양대관과 오세팔이었다. 병문안을 하러 조희진네 집에 찾아 온 그들이 방안으로 몰려들자 짱구는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아니 형님, 위도엔 언제 들어 오셨어요?”

“어, 어저끄 밤에 경찰서서 풀려났고, 격포 우리집서 영길이 성님이랑 자고 오늘 아침 위도로 들어왔는디 머린 좀 어떠냐?”

“새벽에 보건소 가서 치룔 받구요. 집에 와서 약을 먹고 하루 종일 잤더니만 머리도 맑고 통증도 많이 가셨네요.”  
  침몰한 서해훼리호의 대체 여객선으로 엊그제 파장금항에 들어 온 태양호를 급습해서 난동을 부린 죄로 부안경찰서에 잡혀 갔던 이순신은 어젯밤 10시쯤 신궁자의 남편 장영길과 함께 유치장에서 나왔다. 태양호와 서해훼리호 선사인 KS훼리가 ‘없던 일로 하자’고 합의를 해줘서 유치장에 수감된 지 42시간 만에 풀려났다. “희오, 집이 있냐!…”

이번에는 딴치도에 사는 김만수와 박문수가 찾아왔다. 어제 고창댁의 장례를 치른터라 두 사람은 피곤한 기색이다. 박문수를 따라 안방으로 들어 온 김만수가 조희오의 머리를 살펴보며 물었다.

“괜찮냐, 너?”

“네, 형님!”

조희오의 병문안을 하러 왔다가 우연히 동석하게 된 위도인은 모두 6명이다. 이들은 조희진의 처 윤미라가 차려 준 술상 앞에 앉아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서 영범이 넌 어떻기 헐껀디?”

검찰과 경찰로부터 아버지 임사공의 설득을 종용받고 있다고 한탄하는 임사공에게 이순신이 물었다. 

“아니 형님, 지금 무슨 말씀을 그렇게 씸벅씸벅 하시는 겁니까? 돌아가신 아버질 제가 어떻게 자술하시라고 설득을 허냐구요?”

임영범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이순신을 야속하게 바라보았다. 이에 시선을 술잔에 떨어뜨린 이순신은 자신이 말을 잘못했다고 후회를 하는 듯 했다.

“순신이 형님, 엊저녁에 김두길이 이놈으 새끼가 위도유가족협의회 의장을 맡았는디요. 이 새끼 가만 놔두었다간 뒷갈망허기 심들턴게 언능 대책을 강구혀야 된당께요!”

“두길이 이 새끼가 의장을 맡었다는 소린 오늘 파장금서 정심 먹음서 들었다만 진짜 유가족도 아닌 고 새끼헌테 어쩔라고 의장을 맡겼댜?”

“김두길이가요. 국회의원 김금수허고 도의원 맹철수 이 도독놈으 새끼들을 등에 업고 설치고 있는디다 나이는 처먹었지만 김두길이 쫄따구나 진배읎는 김동필이와 심사곤이 이 쪼잔헌 두 노친네가 행동대장을 맡어가꼬 순진헌 위도 사람들 꼬드겨서 교묘허게 밀어붙이는 통에 그렇기 됐는디요. 지가 장담허요만 김두길이 이 새끼 가만 놔뒀다가는요, 위도 주민들 전부 다 절딴나고요. 대한민국에 위도 망신 다 시킬것이고만요!…”

양대관이 이렇게 핏대를 올리자 이순신은 속이 타는지 소주잔을 연거푸 비웠다.  

“만수 너는 어쩌 암말도 안허냐? 우덜이 어떻기 히야 되것는지 대책이 있으면 좀 내놔 보라고!…”

이순신이 맞은편에 앉아 있는 김만수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형님, 저는 어저끄 외숙모 장례를 치르면서 많은 생각을 해봤는디요. 여기 있는 영범이, 대관이 그러고 희오나 문수 야들이 따라만 준다면은 제가 중간 허리를 맡어서 도울테니 형님허고 세팔이 형님이 앞장을 좀 서 주시오.”

“밑도 끝도 읎이 우덜헌티 무신 일을 허는디 앞장을 서라는 것이여, 시방?”

“위도활빈당이라는 모임을 발족시켰으믄 좋겠는디, 그 대푤 순신이 형님이 맡고, 세팔이 형님이 뒤에서 후원을 했으면 좋겠구만요!”

“위도활빈당? 그 옛날 홍길동이 이끌었다던 의적단이 활빈당 아녀?”

“네, 맞습니다. 근데 홍길동이 이끌었던 의적단도 활빈당이지만요. 내년에 백주년을 맞는 동학농민혁명 때도 활빈당이 눈부신 의적 활동을 펼쳤는디요. 위기에 빠진 위돌 살려내고, 나아가서는 이 썩어빠진 나라를 바꾸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활빈당을 한번 만들어 봤으면 좋겄네요. 듣자하니 어젯밤에요, 군산 공설운동장서는 희생자 유가족 천여명이 6차선 도로를 점거허고 시신 인양작업을 제대로 못허고 있는 무능한 정부에 항의를 혔다고 헙디다. 그런데 위도으 방귀 꽤나 낀다는 새끼들은 그 시간에 면사무소에 위도 주민들을 불러다 모태놓고 고작 헌다는 지껄이가 참말로 흐으윽!…”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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